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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y 12. 2016

보스 슈트를 입은 남자

가 되고 싶다.

시카고의 거리를 걷다가 우리나라의 가로수길 같은 곳을 걷게 되었다. 친구가 화장품을 좀 봐야겠다며 키 x이라는 화장품 매장을 들어가서 구경했다. 화장품 가게 안에는 해골 모양의 모델이 서있었고 여러 가지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화장품 가게를 나와 조금 더 걷다 보니 내 눈에 들어오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스였다. 친구 4명이서 움직였는데 2명은 다른 곳으로 가고 나를 포함한 2명은 보스 매장 앞에 섰다.

보스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망설였다. 아 여기는 내가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을 보았다. 여행 중에 보스 정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 샀다는 김 x준인지 김 x준을 닮은 사람인지 보스 슈트를 사는데 여행자금을 모두 썼다가 보스 슈트를 입은 덕택에 숙박업 장사를 해서 보스 슈트 가격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는 얘기였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용인 이형은 여행 중에 보스 매장에 들어가서 슈트를 입어보게 되었는데 본인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보스 슈트를 샀다고 했다. 형이 입은 보스 슈트는 정말 멋져 보였다. 슈트를 입은 형의 모습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여행자는 여행을 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 여행을 포기하면서 보스 슈트를 산 멋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보스 슈트는 뭔가가 있구나. 보스 슈트는 슈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옷의 기능을 넘어서 여행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그 무언가가 보스를 입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그 보스 매장 앞에 지금 내가 서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여진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그냥 옷가게다. 단지 가격이 조금 비싼 옷가게이다. 머리 속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냥 들어가 쫄보야'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야 들어가자, 구경한다고 돈 드는 거 아니잖아. 아마 우리를 돈 많은 중국인 관광객으로 볼 거야." 맞다. 구경하는데 돈 드는 것은 아니다.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보스 매장을 들어갔다. 매장에 들어서니 우리의 행색이 초라보였는지 직원들이 힐끔 쳐다보고 자신들의 할 일을 한다. 돈 많은 중국인처럼 보이진 않았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차려입고 올걸 그랬다. 그렇게 스스로 후회를 하던 도중에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비싼 옷가게면 비싼 옷가게지. 지들이 뭔데 나를 쳐다만 보고 마는가. 유섭이와 나는 보스 정장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최대한 도도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올라갔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표정만큼은 사우디 왕족만큼 못지않았다. 나는 나의 근엄함을 한껏 과시하기 위해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옆에 친구를 보니 친구도 약속이나 한 듯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정장 코너에 가서 회색 슈트를 입어 보았다. 옷이 가볍고 맵시가 났다. 바로 사고 싶었다. 회색 말고 검은색 슈트를 입어보고 싶었다. 그때 직원이 와서 내게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옷 있으세요?" 나는 직원에게 말했다. "제게 맞는 블랙 슈트를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3층의 직원은 1층의 직원과 달랐다. 직원은 내게 두 가지 슈트를 추천해주었다.

첫 번째 슈트를 입어보았다. 보스 매장에 들어와있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멋있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슈트가 몸에 착 달라붙는 게 아 이건 나를 위해 누군가 만들어놓은 슈트구나 라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감탄하고 있을 때 직원이 내게 두 번째 슈트를 권해주었다. "손님에겐 이 슈트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나는 두 번째 슈트를 입어보았다. 첫 번째 슈트와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의 말이 맞았다. 거울을 봤는데 60일 동안 거지 같은 몰골로 여행했던 내게 스스로 미안했다. 그리고 용인 이형의 말이 이해가 됐다. 내가 본 내 모습 중에 이토록 멋진 모습이 있었을까.

슈트를 입은 채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뭔가 싸 보일 것 같아서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정장을 입었을 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정장의 사이즈가 뭔지 보려고 택을 봤는데 모르고 가격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됐다. 슈트 가격은 상의만 170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상의만 200만 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어서 직원에게 주었다. 그리곤 직원에게 말했다. 옷이 참 괜찮네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내 표정은 여전히 사우디 왕자였고 말투는 영국의 신사와 같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냥 한국인 여행자였다. 가난한 학생 여행자.

우리는 빠르지만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보스 매장을 빠져나왔다. 보스 매장을 나와 조금 걸은 뒤 친구에게 물었다. "야 아까 슈트 어땠냐" 친구가 대답했다. "엄청 멋있었어 너 아닌 것 같더라." 우리들은 서로 킼킼대며 다짐했다. 언젠가 저 보스 슈트를 사서 당당히 입고야 말리라.

헤어진 나머지 두 명의 친구를 만나서 우리는 건물 안을 구경했다. 건물 안에는 엑스박스 기계가 있었다. 엑스박스 게임기를 본 친구가 우리에게 말했다. 야 저걸로 팝콘 내기할래? 우리는 승낙했고 팝콘 내기를 건 게임이 시작됐다. 게임 이름은 닌자 후르츠. 동작인식을 지원하는 게임이라 스마트폰에서 기존에 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게임에서 나와 유섭이가 이겼다. 우리는 팝콘을 먹었다. 게임에서 이겨서 그런지 더 맛있었다. 여기는 팝콘을 영화관 앞에서만 파는 것이 아니라 따로 팔았다. 맛있었다. 팝콘을 들고 우리는 전망대를 구경하러 걸었다.


전망대에 가는 길에는 시카고 대화재 때 유일하게 시카고에서 살아남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은 소방서였다. 시카고는 1930년대에 소방서를 중심으로 모든 도시가 계획적으로 지어졌다고 했다. 야망을 갖고 몰려든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 건축가 들에 의해 시카고는 미국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 야경이 보이는 라운지로 향했다. 그런데 전망대 라운지로 올라가는 줄이 생각보다 매우 길었다. 우리는 내일 다시 오자는 의견을 모았고 다시 차가 주차된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지나왔던 보스 매장이 보였다. 아까 뻘쭘해서 찍지 못했던 보스 매장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보스 이 자식. 내가 나중에는 입고 만다.'

차량 주차시간을 연장시킨 우리는 뭘 할지 고민했다. 그때 웅기가 우리에게 말했다. "할거 없으면 재즈카페나 가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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