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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Jun 13. 2016

여행이라는 감옥

솔직히 유명한 여행가들을 보면 부럽다.

밤 10시, 퇴근길 버스에서 채진이를 만났다. 명동을 지나 버스를 타려고 하는 사람들은 피곤함과 기대감이 섞여 버스에 타서 물어본다. "아저씨 자리 있어요?" 기사 아저씨가 힐끔힐끔 쳐다보자 뒤에 앉은 승객이 얘기한다. "여기 자리 있어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쁜 표정으로 앉는 그녀의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책임이라는 중압감이 자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을 안고 살아간다. 나이가 많을수록 책임의 무게는 더해진다. 한창 연애를 하고 있는 채진이는 옆 자리에 앉아 미래의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살짝 들떠있다. 미래를 말하는 채진이의 표정에서 진정한 행복이 느껴진다.

오늘은 또 다른 여행 커뮤니티에서 하는 강연을 들었다. 싸인 수집가 김이삭, 생존 여행가 김 x 원, 여성 여행가 x빈, 펜팔 여행가 장찬영, 오지 전문 슈퍼 포토그래퍼 김병준 등 여행가 중에서는 제법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찬영 씨는 아무리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활동을 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 공허함과 압박감의 이름은 책임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인생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면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이것들을 내팽겨둔채 여행을 하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김이삭 씨는 자신의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힘과 기쁨, 그리고 최종적인 꿈을 행복한 가정이라고 했다. 어릴 적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가족과 같은 사랑을 받은 현지인 호스트에게 수년만에 다시 찾아가 느꼈던 감동을 가슴에 품고 시작한 '대신 만나러 갑니다' 프로젝트. 누군가의 이야기를 갖고 대신 찾아가 감동을 전하는 이 프로젝트 덕분에 지금의 김이삭 씨가 있다고 했다. 추후에 여행을 가지 못해도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하는 이삭 씨. 뭐 이미 많은 여행을 다녀와서 그런 것이 아닐 수 있겠냐는 말을 해보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강연 쉬는 시간 도중, 화장실 앞에서 미용인 여행가 이영주 씨를 만났다. 미용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 노숙자들의 머리를 무료로 잘라주며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sns로만 보다가 실제로 만나니 굉장히 반가웠다.

강연 시간을 마치고 누군가가 여행가들에게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여행 도중에 비가 와서 날씨가 안 좋으면 여행을 계속하나요? 아니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나요?" 그러자 김이삭 씨가 대답했다. "항상 밝은 날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그 장소의 다른 장소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여행가들의 공통점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고난의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 x 원 여행 가는 무작정 간 호주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3개월 동안 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고, 김이삭 여행 가는 아무 반응 없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낯선 땅에서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가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의 여행에서의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우중충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순간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 x 원 여행 가는 40명의 사람 중 단 3명만 손질할 수 있는 참치 손질을 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돈이 안 되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참치 손질을 하는 영상을 찍어가서 집에서 페트병과 칼을 들고 계속 연습했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여행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세계여행을 떠나게 됐다.
김이삭 여행 가는 50년 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43년을 소록도에서 살며 그들을 섬겼던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을 찾아서 여행을 했다. 3개월 동안 이 분들이 어디에 계신지, 살아는 계신지, 나를 만나는 줄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여행을 하다가 결국 인스브루크에서 수녀님들을 만났고 수녀님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추억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김x원씨도, 김이삭 씨도 여행 중에 비가 오는 듯한 어두운 날들이 있었지만 그 여행을 그대로 감내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분명히 동이 트기 때문에, 그들의 밤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밤이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그러한 점들은 각자가 이어져서 하나의 별을 만들었다.

강연자들은 처음부터 강연을 하려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그냥 떠났다.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것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한 여행을 해나갔기 때문이다. 강연자들은 모두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라는 허영심 가득한 여행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 중에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하고 헤쳐나갔는지를 말해주었다.

SNS를 타고 여행이 붐이 되면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이 여행을 하는 것보다 앞설 때가 많다. '내 여행' 보다 '남들이 보는 내 여행'을 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여행을 통해 좋아요 수를 많이 받는 것, 인기를 등에 업고 책도 쓰고 강연도 나가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부러운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아리랑 스쿨로 유명한 여행가 문 x우 씨가 말한 "남들의 관심은 돈이 된다."라는 말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시선이 발목의 족쇄가 되는 것을 느꼈다. 여행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이지 얽매이기 위해 가는 아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이라는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들을 무턱대고 버리는 여행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채진이와 같이 탄 버스가 서현역에 도착했다. 뒤풀이에 참여해 여행가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동훈이 생일 파티에 왔다. 왁자지껄 떠들다 보니 어느새 새벽 두 시,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텅 빈 야탑역 광장을 바라보니 아직은 차가운 기운과 함께 봄 냄새가 맴돈다. 그래, 지독히도 차가운 겨울도 지나고 이제 봄이 온다. 내 인생에도 슬며시 봄이 찾아오길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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