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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05. 2016

안개 같은 현실이 다가와도

희망이라는 해가 뜨면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다.

막국수를 한 그릇 먹고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탔다. 뭔가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왼쪽에 바다가 보였다. 제주는 섬이기에 바다를 끼고 걸어가면 바닷가에 있는 집에 도착하겠지 하는 마음에 쭉 걸었다. 그런데 점점 안개가 짙어졌다. 길을 걷다 보니 문득 길을 잘 가고 있는 게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바다가 왼쪽에 있으면 집에 도착할 것을 알면서도 눈 앞에 안개 때문에 두렵다.

계속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희망을 갖고 걸었는데 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나를 가둬버렸다. 사방이 뿌옇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위험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괜찮아. 그래도 걷다 보면 집이 나올 거야.' 되뇌고 계속 걷는데 길이 없다는 표시가 나타난다. 

표지판을 옆으로 끼고 다른 길로 걸었다. 차 한 대,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는 길. 잘못 왔다 싶어서 돌아가려 했는데 연못이 보인다. 부슬부슬 내린 빗방울이 모여 연잎 위에 맺혀있다. 연잎이 너무 예뻐 나도 연못에 잠시 맺혀있기로 했다.  

제주에 온지도 어언 한 달이 됐다. 쓰고 있는 책을 여기서 완성해가고 싶었는데 이제 겨우 초안을 완성했다. '괜한 짓을 하는 건가. 내 주제에 무슨 책인가.' 펼쳐놓은 계획들과 내일에 대한 수많은 다짐들이 오늘따라 나를 옥죈다. 안개가 낀 듯, 진흙 속에 빠진 듯 답답하다.

진흙 속에서 시련을 딛고 열심히 피어난 연꽃이 나를 위로해줄까 싶어서 연꽃을 찾아보았지만 연꽃은커녕 꽃 한 송이 없다. 우울한 마음으로 연잎을 바라보는데 연잎 위에 물방울들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려 빗방울들이 모인다.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예쁘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피어있는 연꽃보다 아직은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은 연잎이 왠지 내 모습 같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초록색 이파리지만 그 위에 담겨있는 순수한 물방울들은 보석처럼 예쁘게 빛났다.

바로 그때, 강아지 두 마리가 날 슬쩍 보고 걸어간다. 귀엽길래 따라갔다. 강아지가 멈춘 곳에는 돌멩이로 두 글자가 쓰여있었다. '희망'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고마운 마음에 가방에 있는 과자를 쪼개서 주었다. 연못에 머무는 동안 안개가 걷혔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사람들이 트레킹으로 걸어 다니는 올레길이었다.

안개 같은 현실이 다가와도 계속해서 걸어나가자. 희망이라는 해가 뜨면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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