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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Sep 24. 2016

항공사 면접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충격은 컸다.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있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졌다. 까치밥으로 매달려있던 무른 감 위에 눈이 내렸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이내 하루 만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항공사 면접에서 떨어진 것 같이.

사실 예상했던 결과라고 하기엔 기대가 너무 컸다. 몇 번이나 새로고침을 다시 누르며 잘못된 정보일 거야 라는 부질없는 클릭을 해봤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몇 번이고 다시 했을 때 내 눈에는 선명하게 세 글자가 보였다. '불. 합. 격'

기말고사 기간과 하 xx교회에서 부탁받은 설교 작성, 브런치에 연재하는 글, 항공사 영어면접 준비가 한꺼번에 겹쳤다. 공중에 떠다니는 시간은 많은 듯한데 스트레스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계획이 많아질수록 부지런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나는 둔해지고 게을러졌다. 모든 게 하기 싫었다.

꿈을 꾸면 항공사 비행기를 타는 꿈을 꿨다. 예쁜 스튜어디스를 사귀는 꿈도 꾸고 세계여행을 하며 책을 쓰는 꿈도 꿨다. 그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부모님을 세계여행 보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꿈속에서나마 행복했다. 면접에 대한 스트레스로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위안하다가 잠이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일어나 할 일을 하거나 조금 일찍 일어나 잠을 얼마 자미 자지 못하고 설친 채로 하루를 생활기도 했다. 그만큼 내겐 스트레스였다.

떨어지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후련하기보다는 속이 아리다. 씁쓸하기도 하고 왜 항공사를 지원하게 만들어서 내 시간을 잡아먹었나 하는 마음에 분노도 치밀었다가 이내 힘이 쭉 빠지기도 한다.

원래 항공사에 떨어지면 플랜 B로 바로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전국에 있는 성지들을 여행 다니며 맛집도 찾고 교회에 계신 목사님들을 만나 뵙고 코스를 짜 보려고 했다. 그런데 시험기간과 설교가 애매하게 겹쳐서 바로 떠나지도 못하게 됐다.

이 심리적 압박감을 그냥 떠안고 주일에 설교하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아무 데나 무작정 떠나 보기로 했다. 일단 그전에 합격하면 가족과 같이 먹기로 했던 초밥을 혼자 먹으러 갔다.

초밥집에 갔는데 테이블 유리 밑에 각 나라의 화폐가 꽂혀있었다. 마침 지갑에 있는 네팔 돈이 있어서 네팔 돈을 초밥집 실장에게 주었더니 내게 도미회와 장어초밥을 서비스로 주었다. 뚱뚱한 도미회를 입안에 넣자 혀가 두 개인 느낌이 들었다. 도미회의 껍질은 오도독 씹혔으며 환상적인 살에서 나는 은은한 단맛이 났다. 장어는 한 입에 먹기에 클 정도였다. 크게 한 입을 벌려 가득 채운 장어초밥이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기분이 조금 풀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아무 기차나 찾아보았다.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아무 곳으로나 훌쩍 떠나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내 미래처럼 앞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나면 왠지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기차 티켓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바로 갈 수 있는 기차는 아주 가까운 거리 거나 아니면 티켓값이 아주 비싼 경우였다. 난감했다.

창현이에게 연락이 왔다. 면접에서 떨어진 것을 위로해주며 기차표값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계좌번호를 몰라서 이거라도 보낸다며 영화 티켓을 건넸다.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싶었지만 영화티켓도 고마웠다. 면접 때 정장에 찰 시계가 없어서 창현이 한테 시계를 빌렸다. 합격하면 가지라고 했었는데 돌려주게 되었다. 시계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불합격의 상징처럼 다가와 아쉬움을 더했다.

서울역 환전소는 환율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래저래 달러가 많이 오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통장에 있는 돈을 달러로 바꿨다. 여행 가기 전 환전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 설레었다. 기차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지하철 여행으로 일정을 바꿨다. 1호선을 타고 두 시간 이십 분 정도를 가면 온양온천이 나왔다. 온양관광호텔에 있는 온천이 가장 유명하다곤 하는데 그냥 찜질방이 싸고 좋아서 찜질방으로 향하고 있다. 지하철을 오래 타고 가다 보니 엉덩이가 아프다.

지하철 안에서 한잔 아저씨 한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는 아저씨였다. "젊은 놈들이 정신상태가 썩어 빠졌어. 우리 땐 말이야 애도 순풍순풍 낳고 대기업 중소기업 안 가리고 바로 취업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말이야. 요즘 것들은 뭐 삼 x이나 현 x 아니면 안 가려하고 애도 너무 안 낳니까 이게 대한민국의 미래가 안 보여." 1호선 지하철을 혼자 전세 낸 아저씨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듯한 목청으로 지하철에 탄 젊은 청년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쳤다. 지하철에 탄 청년들은 웬 개가 짖는가 하는 표정으로 취객의 원맨쇼를 구경했다. 실로 개소리였다.

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갈 때 중요한 것은 선원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바람과 파도의 방향이다. 선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파도와 바람이 반대로 세차게 불면 배는 제자리를 버티는 것도 힘들다. 70-80년대 한창 경제성장이 이뤄지는 때, 기업은 많고 사람은 없기에 졸업하면 기업들이 서로 스카우트하여가려고 안달이 난 시대를 살아온 아저씨가 단지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해서 청년들의 정신상태가 썩었다고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나이 많은 아이 같았다. 취객이 지하철에서 내렸다. 청년들은 각자 책을 꺼내들거나 영어 단어장을 펼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온양온천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찜질방에 갔다. 아무도 없는 노천탕에 혼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떠있었다. 처음에 물에 들어갈 때는 물이 거세게 요동쳤지만 달을 바라보고 차분히 앉아있으니 고요해졌다. 노천탕의 물은 내 마음과 같았다.

'그래 처음이라 요동치는 걸 거야. 이렇게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잠잠해질 거야.'

나는 그렇게 수면실에 가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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