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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Oct 16. 2016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요즘 업로드가 왜 이렇게 뜸하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나는 마냥 쉬고 있지 않고 분명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더 강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해두고 싶다.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게 됐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랐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유산인 한글이 떠올랐다.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했고 연세어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같이 공부하는 뜻깊은 동료들을 만났다. 
연세어학당에서 맺어준 3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발 벗고 찾아 나서니 10명의 학생들과 친해지게 됐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제주도에 있을 때부터 도서관을 다니면서 공부했고 연세어학당을 다니면서는 해가 떴을 때부터 잠에 들기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리고 최근에 시험을 치렀다. 근데 망한 것 같다. 문제가 어려웠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결국 내 실력이 부족해서이다. 예상보다 좋지 않은 성적이 나올 것 같다.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국어를 직접 가르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계획하는 것은 한국어 교육 플랫폼이다. 1인 교육자로서의 모습은 온전히 갖추지 못하겠지만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과 무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교과서와 교실 안에 갇혀있는 한글을 몸소 체험하고 익힐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싶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프리카 우간다라는 나라를 갔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평생 꿈으로 삼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그 자리에는 대부분 선교사님과 목사님이 계셨다. 나는 그런 이유로 신학교를 갔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토대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동기들은 전도사라는 호칭 혹은 목사라는 호칭으로 교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모순과 실망스러운 모습이 판을 치는 교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들의 모습은 대단히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교회 안보다 교회 밖에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경험하면서 다시금 어린 시절 나의 초상을 떠올려보았다. 신학교 나와서 유학 가고 큰 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 하고 개척교회 나가서 신도도 모으고 그렇게 번듯한 교회 차려서 목회하는 게 내가 꿈꿨던 모습이었던가.

사실 그것은 일반 대학을 나와서 유학을 다녀오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을 하고 사업체를 차려서 고객을 유치하고 그렇게 번듯한 회사를 차려서 사장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내가 정말 원한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나는 그 수단을 한국어 교육으로 잡았다. 10만 원을 후원하면 한 달을 살고, 우물을 파주면 1년을 살 수 있지만 기술을 가르쳐주고 일자리를 만들어 시장을 형성하면 평생을 먹고살 수 있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한두 번의 노크로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문이지만 언젠가 열릴 것을 믿는다. 내가 생각한 실패는 큰 그림에서 본다면 성공일 것이다. 잠시 멈추었다고 느낀 지금.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심심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해보면서 다시 문을 두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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