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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Jan 10. 2020

여행을 꾸며주는 사람

가이드

나는 가이드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3시간짜리 투어 하나를 온전히 마음에 들게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필요한 것들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준비하는 장소에 대한 단행본과 논문들, 그리고 1차 사료들을 참고하여 스크립트를 짜고 같은 장소에서 계속 반복하여 내용을 숙지한다. 그리고 수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투어를 진행한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질문이다. 아이들은 참 사소해 보이는 것들도 질문한다.


-이 돌은 왜 이렇게 생겼어요?

-저 나무는 뭐예요?

-이 꽃은 왜 여기에 심겨있어요?


투어 구성원들 중에 어른들이 많아서 내용의 흐름이 자주 끊기면 눈치껏 어머니가 아이를 통제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은 제법 날카롭고 핵심을 지적할 때가 많다. 별거 아니어 보이는 돌의 생김새, 아무렇게나 심긴 것 같은 나무의 종류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게 된다. 예컨데 몸이 병약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심어놓은 건강에 좋은 약초라던가, 장수를 기원하는 조경의 상징이었던 돌이라던가 한다는 이야기들로 연결이 되어 투어의 내용이 더 풍성하게 될 때가 많다. 아이들은 참 좋은 선생님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투어를 진행하다 보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 때문에 신이 나서 설명에 스스로 도취될 때가 있다. 정해진 장소에서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훌륭하게 전달하면 느껴지는 왠지 모를 뿌듯함. 이것은 흡사 마약과 같이 중독이 된다. 많은 정보를 짜임새 있게 전달하는 것이 투어의 최종적인 성공이라고 속단하고 있던 어느 날,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손님이 찾아왔다. 멕시코에서 온 한인 교포 손님들이었다. 그 날은 굉장히 더운 여름이었다.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더운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멕시코시티에 비하면 이 정도 더위쯤이야 우습죠.


그렇게 투어를 시작한 지 30분 정도가 되었을 때, 한 손님이 탈수 증세를 보이며 주저앉았다. 나는 전 날 냉동실에 얼려놨던 물수건과 얼음물 세트를 나누어주었고(사실 이건 투어 마지막에 서프라이즈 선물로 준비했던 것이었는데) 에어콘이 나오는 곳으로 대피하여 응급조치를 했다.


-한국의 더위는 멕시코하고 또 다르네요. 감사해요.


그렇게 3시간짜리 투어가 30분 안에 끝나버렸다. 그렇게 손님들은 멕시코로 돌아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손님들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주었다고 했다. 지식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정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의 전달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뛰어난 지식을 갖고 화려한 언변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실제로 가이드 투어를 경험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보다는 여행할 당시에 느꼈던 감정, 그때의 공기, 떨어진 꽃잎과 흩날리는 낙엽과 같은 주관적인 것들이라고 한다. 가이드는 학자가 아니라 여행을 즐겁게 꾸며주는 엔터테이너라는 것. 지식의 늪에 빠질 때면 다시금 이 글을 보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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