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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타지마할과 인도의 진짜 냄새

사랑과 그들의 삶


인도 여행을 떠나기 전 인도하면 생각나는게 카레, 간디, 그리고 타지마할이었다. 누군가가 타지마할이 인도의 수도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타지마할은 유명하다.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 타지마할이 인도의 왕이 사는 곳인 줄 알았다. 인도의 왕이 사는 곳은 저렇게 멋있구나 인도 사람들도 뭔가 대단한 문명이 있겠다 싶어서 호기심을 가졌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굉장히 달랐다.


타즈 : 왕관
마할 : 궁전
타지마할은 직역하면 궁전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마할은 궁전이 아니라, 왕이 사랑했던 뭄타즈 마할이라는 왕비의 이름이다. 즉, 조금 더  의역한다면 뭄타즈 마할 왕비의 왕관 정도가 되겠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는 인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들어와 지배했던 무굴제국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때 있었던 왕 중에 한 명이 샤 자한이다. 샤자한은 왕비를 많이 사랑했다. 왕비가 죽자 왕비를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왕비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무덤을 만드는데 국가 예산이 너무 많이 탕진되었고, 샤 자한은 민심을 잃었다. 결국 막내아들인 아우랑제브의 반란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기고 아그라 성에 갇혀서 멀리서 완공된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샤 자한이 죽은 뒤에 샤 자한은 그토록 사랑하는 왕비 옆에 묻혔댜.


사랑의 힘은 이렇듯 위대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모든 것이 공통으로 수렴될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는 구분이 없다. 인종, 국적, 신분, 계급, 형편에  상관없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고 인간의 유한함을 무한함으로 바꿔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유적지를 보면 항상 1600년대 전후의 설립 연대가 보였다. 분명히 세계 4대 문명에는 인더스 문명이 포함되어있어서 굉장히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을 보며 인도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인도에 오기 전에 인도는 '신들의  나라'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막상 와 보니까 그렇지도 않았다. 무분별한 신호위반,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흥정하는 릭샤 기사들, 가난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인도는 지극히 인간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과연 인도가 신들의 나라라는 얘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보니 인도에는 힌두교가 있었다. 그래서 힌두교를 찾아보았다. 흥미롭게도 힌두교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가 없다. 힌두교는 기원전 2300년 전부터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힌두교는 타 종교와는 다르게 종교가 생겨날 때 이것을 창시한 정신적 지도자도 없고, 절대적인 경전이나 교단 또한 없었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 자연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그것들이 지역별로 생겨난 민간신앙의 복합적인 형태이다. 그들은 '베다'라는 경전을 갖고 있지만 절대적인 경전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신은 창조의 신 브라마, 창조한 세계를 유지하는 신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시바이다. 이 외에도 수 많은 신들이 있는데 신들은 각자 고유한 영역이 있다. 생각해보니 인도 어디를 가도 신기하게 생긴 신상들이 있었다. 슈퍼마켓에 가도, 릭샤를 타도, 유명 유적지에 가도, 화장실에 가도, 심지어 KFC에 가도 신의 그림이나 석상이 있었다. 사람이 활동하는 모든 곳에 신이 있었다.


힌두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이슬람 문명의 꽃인 타지마할을 보고 힌두교 사원을 가게 되었다. 큰 유적지가 아닌 실제로 아그라 사람들이 가는 자그마한 사원이었다. 신발을 벗고 사원에 들어가자 어떤 한 남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원숭이 신인 할루만에게 정성스레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할루만은 보호의 신으로서 액운에서의 보호를 해준다고 했다. 향불을 피워 여기저기 연기를 퍼뜨리고 원숭이 신상의 입에 고구마로 만든 부스러기 형태의 공물과 설탕으로 만든 별사탕을 넣으며 바닥에 키스를 연거푸 하는 그 남자의 모습이 굉장히 간절해 보였다.


건너편에 있는 신상은 시바신이었는데 시바신의 아들 가네샤와 아내 파라바틱, 그리고 소의 신상이 같이 있었다. 이들은 시바신의 가족이라고 하였다. 신상을 보고 설명을 듣고 있는데 원숭이 신에게 기도하던 그 남자가 아들 둘을 데리고 시바신이 있는 신전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시바신에게도 마찬가지로 기도를 한 뒤에 종을 쳤다. 종을 치는 의미는 기도가 하늘에 닿았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했다. 신전 안은 공물 때문인지 셀 수 없이 많은 파리떼와 벌들이 있었다. 사실 내 눈으로 보았을 때는 매우 비위생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발을 벗고 나름대로의 정결을 유지한다. 술이나 고기를 먹은 날에는 신전에 들어가지 않고, 마음가짐을 정결히 한 다음에 신전에 들어간다. 작은 신전 안에 그들만의 질서가 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읽을 때 많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구약에 나오는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는 바벨론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 신화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고, 예수의 부활 모티브 또한 수메르 신화의 내려가는 이난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 이미지와 물 위를 걷는 기적이야기도 당시에 존재했던 주변 국가들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성경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대의 사람들은 사물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신화에 근거했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이성과 과학의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신화적인 표현으로 접근하는게 훨씬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소를 죽이면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가 시바 신이 타고 다니는 영험한 동물이면서 동시에 시바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화에 밀접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요소가 바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소였다. 과연 인도는 신들의 나라가 맞다.


인도를 떠올리면 또  생각나는 것이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카스트제도이다. 어느 사회에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한다. 사람들의 생각 깊은 곳에 신들이 존재한다면, 신들을 이용해 기득권을 지키는데 용이할 것이다. 종교는 때론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아주 좋은 수단이 된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있었던 십자군 전쟁과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행해졌던 마녀사냥이 그 예이다.


카스트제도의 기원에 대한 얘기는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지만 기원전 1300년경에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여 힌두교 위에 세웠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계층 간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계급제도는 흡사 플라톤의 4주덕과 비슷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4주덕을 들었을 때는 합리적인 국가의 이상 통치 방법과 같은 생각이 들지만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왠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불의한 일과 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플라톤의 4주덕은 고대사회의 이상 논리로 남아있고, 카스트제도는 우리의 눈에 비치는 비참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인도의 많은 모습을 보면 세계 경제 9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인도 북부만 여행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까지의 인도의 모습은 2007년도에 갔었던 아프리카의 우간다보다도 낙후되어있다. 기차역에는 팔 혹은 다리가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이 즐비하고, 동물의 오물과 진흙이 고여있는 썩은 물 곁에서 사람들이 누워있는 풍경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뼈가 앙상한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여성들의 모습 또한 자주 보인다. 경제가 발전했는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는 빈부의 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화 속에 힌두교의 정신이 이리도 깊게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과연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힌두교의 진짜 냄새를 맡고 싶다. 힌두의 고유한 가치 혹은 그들만의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바라나시로 떠난다. 힌두의 시작이자 끝, 어머니와 같은 생명의 강, 갠지스강으로 이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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