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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Mar 31. 2016

위기의 인도, 강간범에게서 도망치다.

그리고 만난 새로운 인연

카일과 같이 기차역에서 내린 뒤에 다음 기차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티켓팅을 하기 위해서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에 가게 되었다. 근데 뭔가 수상했다. 직원이 자꾸 얼마를 주면 어디를 데려가주겠다 라는 식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뭔가 수상한 낌새를 차린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왔고 서로의 연락처와 숙소 위치를 공유했다.



기차역에서 나와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에서 하와마알(바람의 궁전)을 향해 갔다. 아쉽게도 카일과의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와마알은 사진으로 보기엔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실제로 별 감흥이 없었다. 1700년대 말부터 1800년대 초까지 지어진 이 건물은 벗겨진 페인트칠과 갈라진 벽,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곳들이 가득했다. 유적지의 원 모습을 상상해보면 아름다웠지만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복원과 관심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는 릭샤를 타고 암베르성 향했다. 이제 조금 인도의 교통문화가 익숙해졌기에 릭샤 기사와 흥정을 한 후에 자연스럽게 암베르성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는 도로에 코끼리가 돌아다니는 풍경 또한 볼 수 있었다. 암베르성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성곽이 마치 만리장성과 같이 성을 빙 둘러쌓은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듬성듬성 끊어진 흔적도 보였지만 어찌 되었든 성곽 안에 있는 암베르성은 천연의 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릭샤에서 내려 성을 올라가는데 염소 한 마리가 우리와 동행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염소는 열심히 걸어올라갔고 우리는 염소를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얼굴에 바른 선크림이 땀과 함께 주르륵 흘러내려 눈을 따갑게 만들 즈음에 우리는 성 입구에 도착했다. 염소는 성  입구에서부터 다른 길을 걸어갔고 우리는 성 안으로 향했다. 암베르성은 미로와 같았다. 더운 날씨에 역사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로 유적지를 돌아본다는 것은 내게 굉장히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와 크다. 예쁘다. 멋있다.' 등의 생각이 연속으로 들지만 돌아보면 모두 까먹어버리는 부류의 여행을 가장 혐오하는 나이기에 더욱 그랬다. 

미로와 같은 성을 빠져나와서 차가운 물 한 병을 샀다. 나무 밑 그늘에서 뜨겁게 달궈진 머리에 물 한통 적시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때 암베르성 입구의 광장에서 익숙한 복장의 사람들이 보였다. 

흰색 팔토시에 반팔, 손에 들고 있는 셀카봉, 까무잡잡한 황색 피부는 한국인임에 틀림없는 겉모습이었다. 경수와 나는 그냥 못 본 채 하고 성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기요, 한국인 맞으세요?" 나는 그냥 가려고 하는데 경수가 대답했다. "아 네" 그들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우리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 들어보니 우리를 놓고 3명이서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내기를 했다고 한다. 내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는 데에 4-500만 원짜리 카메라를 걸었던 여자 한국인은 절망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렇게나 내가 중국,  일본인처럼 생겼던가. 

21살의 나이인 그들은 각각 한국화과, 법학과, 문예창작 과였는데 사진 동아리에서 만나 같이 인도 여행을 2달 동안 온 것이라고 했다. 성곽에 앉아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이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은 주로 인도 현지인들의 사진이 많았다.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을까? 알고 보니 인도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내가 사람들을 관광객 돈이나 뜯어먹으려고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난 나쁘다. 그 학생들은 현지 사람을 모두 의심하던 내 척박한 마음에 단비를 주었고 편협한 시각의 안경을 벗겨주었다. 인도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많다. 나는 이 점을 그동안 수태 만난 삐끼(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들 때문에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사람들은 있었다. 성에서 나와 그 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다 보니 그들이 묵는 숙소 주인이 조금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전과가 아주 나쁜 사람과 생김새가 매우 닮았고 이름 또한 같다.(칸) 기차역에서 우연히  소개받게 된 그 숙소는 한국인을 상대로 여러 번 악질범죄가 일어났던 장소였다고 했다. 학생들은 겁에 질린 상태로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 중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생들이 우리 숙소에 있다가 저녁 기차로 출발하는 것을  제의했고 그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참 소름이 돋았던 것은 그 범죄자(칸)가 학생들이 우리 숙소에 온지 얼마 안돼서 그들을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능청스럽게 우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인사를 건네는 그를 피해 우리는 숙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침대에 5명이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범죄자 칸 얘기는 사라지고 서로의 얘기를 하게 되었다. 한 학생은 아르바이트 모은 돈 60만 원, 근로장학금으로 모은 60만 원으로 인도에 오게 되었고,  다른 학생은 휴학을 하고 사진관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은 과외와 필리핀에서 어학원 매니저로 번 돈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 친구들에게 내가 물었다. "그렇게 열심히 번 돈으로 여행하면 아깝지 않아요?"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대답했다. "그럼요 여행이 얼마나 즐거운데요" 그들의 계획을 들어보니 한 달 동안 40만 원으로 여행하는 코스였다. 그들의 씀씀이를 보거나 현실적으로 인도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의 예산을 따져보았을 때 분명 비상금과 부모님 찬스를 쓸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도 그 패기와 젊음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가. 순수한 그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친구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 전공에 대한 고민으로, 군입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찬 그들은 빨리 군대를 다녀오고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군대를 갔다 오면 무엇이든지 잘 될 줄 알았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그때 내가 했던 고민들은 당시에는 내게 전부 큰 고민 들었지만 되돌아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을 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현실감각을 세우되 그로 인한 걱정에 함몰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한껏 즐기기에도 짧은 인생, 걱정해서 무엇할까. 미래에 대한 두터운 두려움이 한층 얇아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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