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골계곡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깊은 계곡엔 물 흐르는 소리만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간혹 보이는 하늘은 계곡에 가려 색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맑은 계곡물과 초록의 이끼만 돌과 돌 틈 사이에 끼어 있었다. 녹색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며 군데군데 망보듯 구멍을 만들어 청아한 하늘빛을 비추고, 가끔 그 사이로 바람만 지나다니고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에 출발한다는 버스를 타기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뭐 거창한 것 아니고 샤워를 하고 시간이 좀 나기에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뜨거워진 물을 머그잔에 붓고 커피를 떨어뜨려 녹이고. 아침을 먹기 전에 커피를 마셔본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식전 커피 맛은 강렬하다. 뜨겁고 검은 액체가 가지는 매력은 마약과 같다.
따듯한 커피가 식도로 들어가고 향은 콧속을 간질인다. 카키색 잔 속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조금 일찍 일어났을 뿐인데도- 질서 정연한 의식처럼 진행된다.
천천히 걸어서 버스 탑승 장소로 가니 차는 도착해 있었다. 이 모임에서 주최한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집사람은 두 번째지만 난 처음이어서 들어가면서 뵙는 분들께 가볍게 목례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동탄 시내에서 한 군데 더 들리고 차량은 오산을 향해 간다고 했다. 오산 시청 앞에서 오늘 계곡 모임 하는 분 다수가 탈 거라고 집사람이 귀띔해 준다. 아내 말대로 상당한 인원이 시청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차례대로 차에 올랐다. 동일 장소에서 집사람 친구 부부도 같이 타기로 되어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기 하얀 모자 쓰고 붉은색 점퍼 입은 사람이 집사람 친구라고 이야기해 준다. 두 분이 오시면서 가벼운 목례와 눈인사가 이루어졌다. 바로 우리 뒷자리다.
전원이 탑승한 차가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여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목적지를 향했다. 진부 톨게이트가 보인다. 여기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단다. 차가 국도를 달리면서 서행한다. 길가 밭의 농작물이 눈에 들어온다. 잘 자란 대파밭이 싱그럽다. 양배추와 배추 그리고 옥수수도 보인다. 순백의 피부를 가진 자작나무도 길가에서 잎을 흔들며 사랑스럽게 길손을 반기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항골 계곡. 정식 명칭은 항골 숨바우 길. 길 안내판을 읽고 초입에 들어섰다. 숲 해설사분의 설명이 있었다. 동네가 쇠락하여 인원을 끌어들이고자 계곡을 다듬고, 트래킹을 위한 길을 만들었다고. 정식 개장은 2022년 10월 27일에 시작했다고 한다. 뱀을 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도 함께.
초입부터 장관이다. 버스 안에서 들었던 설명과 달리 수량도 넉넉하고 사람 지나는 길을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원했다. 때마침 계곡으로부터 바람도 불어오고 한낮의 더위를 날려줄 만한 요소는 다 갖춘 장소였다. 길은 오르막과 편평한 길이 나오는데 초보자도 걷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난 등산화를 신고 있어 걷는데 편안했다.
산속 계곡이어서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구부러지고 흐르다가, 커다란 돌을 만나면 거친 속살을 드러내며 허연 거품을 일으킨다. 낙차가 있는 높이에서는 물소리가 웅장해진다. 그리고 반드시 아래엔 깊은 소를 만들어 놓았다. 짙고 검푸른색 물빛과 함께.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온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적당한 자리를 잡고 전체 인원이 모였다. 이른바 간식타임. 저마다 담아 온 음식들을 꺼내놓고. 이런 자리에 막걸리가 빠지면 안 된다. 다른 분이 가져온 막걸리를 종이컵에 담아주신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쭈욱 들이켰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맑은 물과 공기와 시원한 물소리까지. 모든 것이 합일된 장소에서 마시는 무엇인들 맛없을 수 없지 않을까? 안주로 부침개도 준비가 되어있다. 집사람이 꺼내놓은 멜론 조각이 잘 팔린다. 특히 여자분들의 반응이 좋다. 과일의 단맛은 설탕과 달라 먹으면서도 인위적 부담감을 줄여준다. 또 만족감과 행복감도 같이 가져온다.
다양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온다. 닭발 부침, 오징어채, 돼지껍질 무침, 전과 쌀 빵까지.
오늘 차에 승차한 인원이 35명이라는데 음식이 들어가며 포만감을 가진 듯하다.
몇 분이 옷 입은 채로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이어 다른 분도 동참하고 많은 분이 동심으로 돌아가 계곡에 몸을 맡긴다. 난 얼굴과 어깨를 씻고 발목까지 물속에 담갔다. 땀이 쑥 들어간다. 더위가 가시면서 발가락이 서늘하다.
자연은 오묘하다. 이 땅에 살아온 사람만큼 정겹다. 위압감을 주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다가와 품에 안겨도 좋다고.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뉘고 충전해 가라고 다독인다. 오늘도 그렇다. 팔월 더위에 한숨 돌리고 쉬어도 좋다고 품을 내어주었다. 2025.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