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차로 30분쯤 무봉산을 향해 가다 보면, 길옆 오른쪽에 4층 건물이 보인다. ‘디딤돌’이라 이름 붙여진 카페, 내가 가끔 찾는 곳이다.
디딤돌이란 단어는 다른 이의 삶에 보탬이 되고 나아가도록 돕는 발판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마중물과 비슷하게,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나는 이 단어들을 좋아한다.
건물은 3층까지 비어 있고, 4층만 카페로 운영된다. 앞 풍광이 수려하다. 시야가 훤히 트여, 시선을 막는 것이 없다. 앞에는 키 큰 메타세쿼이아 두 그루, 그 너머로 중리 저수지와 멀리 무봉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카페 왼쪽엔 동탄 톨게이트가 있어 차들이 오가지만, 그리 복잡하지 않다.
무엇보다 실외 테라스가 매력적이다. 햇볕과 바람이 좋은 요즘,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경치를 감상하고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커피값도 합리적이며 맛도 훌륭하다. 요즘 새로 생긴 카페들은 가격이 비싸고 주차가 어렵지만, 이곳은 편리하고 부담이 적다.
지난겨울, 눈 오는 날 일부러 찾아온 적이 있다. 커피 한 잔과 시그니처 메뉴인 에그타르트를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기둥 옆 탁자에 앉았다. 멀리 눈 덮인 무봉산 자락을 바라보고, 테라스 추녀 끝 고드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온통 설원으로 덮인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과 몽환적 풍경은 덤이었다. 눈 오는 날 산 능선을 보면 삭정이들이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람에 흔들려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따뜻한 실내에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럴 때 상념의 바다로 침잠할 수가 있다.
추운 계절은 시간이 주는 매력이 있다. 시간이 동장군의 추위에 꽁꽁 얼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버린 듯한 착각이 든다. 천지가 흰 눈에 덮여 방위를 잴 이유가 없는 계절이라는 생각도 든다. 눈앞의 저수지도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가는 시간을 담아 버렸다. 유일한 감각인 시각도 눈을 감으면 먼 곳부터 다시 시작하여 지금까지 온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둔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닦아보고 어루만질 수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저절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가끔씩 옛 일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리 바쁘게 살아와 놓고, 힘들어 몸에 마음에 탈이 났던 것들을 기억해 놓고, 내 어깨를 감싸고 위로하는 것도 이 겨울에 해야 할 일 중 하나 아닐까?
나이 들어가는 게 꼭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격해지려고 하면 이제는 숨을 크게 쉬며 달랠 줄도 안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다. 한낮 햇살 아래 눈 덮인 텃밭 지난가을 맨드라미가 빨간 벼슬을 삐죽이 내밀었던 자국을 남기며 다시 맞이할 봄을 기다리고 있다. 제 스스로 살아가며 자양분을 거두어들이는 식물처럼 이제부터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매일매일 순간에 감사하려 한다. 시간을 잘 보내고, 공간에 폐 끼치지 않고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것이 나이 먹은 자들이 해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겨울엔 생각을 많이 하고, 거둔 생각들을 다음 세대를 위한 디딤돌로 사용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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