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카페

by 서장석


늦은 아침을 먹고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어제 내린 비로 공기가 눅눅하다.
자고 일어난 찌꺼기가 몸 여기저기에 성기게 붙어 있고, 얼굴엔 베개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밤새 뒤척이며 싸운 흔적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어진다.
샤워실로 향하며 속옷을 벗고 알몸이 된다. 둥글게 나온 뱃살은 내 나이를 증명하고,
앞머리는 벗어져 반들거린다. 온수를 틀어 손에 받아 온도를 맞추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거울은 젖어가는 나를 보여주며 머리로 떨어지는 물과 수증기를 비추고 있다. 퀭한 눈빛도 함께.
비누 거품으로 지난밤의 흔적을 지운다.
거울은 김으로 뿌옇게 변하고,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우자 새로운 내가 웃고 있다.

아침을 먹고, 샤워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 반복이 오늘도 이어진다.

선반에는 다양한 차가 대기 중이다.
강릉에서 공수한 BOSSA NOVA COFFEE, 대만에서 가져온 홍차, 보이차, 연잎차, 박하차,
TWG 녹차, 그리고 호숫가에서 따와 말리고 덖은 국화차. 그중 내가 아끼는 건 국화차와 TWG 녹차.
손님이 오면 내어놓는 귀한 차다.

집은 지상 50미터 위에 떠 있다.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며 앞이 탁 트인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대만산 홍차를 꺼낸다.
핏빛 같은 붉은색.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향, 혀끝에 남는 살짝 텁텁한 맛.
한 모금 삼키며 문득 TV에서 본 스리랑카 차밭 풍경이 떠오른다.
맨발의 여인들, 머리에 큰 바구니를 이고 땡볕 아래서 잎을 따던 모습.
아이들은 양철지붕 그늘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시던 홍차가 그들의 수고로움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시기가 미안하다. 수고로움에 감사하며 한 모금 마신다.

베란다 의자에 앉아 멀리 펼쳐진 세상을 바라본다. 눈앞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꼭대기가 내려다보인다.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나무들.
사람만 힘든 게 아니다. 저 친구들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지에 붙어살아야 하는 게 모든 생명의 이치인데, 인간만은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벗어나려 한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경제 행위와 상관없는 사유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헛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얼굴을 찌푸리며 퍼붓던 비를 다시 데려오려 한다.
공기는 쿰쿰하고 무겁다. 나는 베란다 창으로 불어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기분은, 생각은 점점 가라앉는다.

오늘은 여럿이 있는 카페보다 혼자 있는 이곳이 낫다. 생각이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 덕에 따뜻한 차가 오히려 시원하다.

첫 잔을 비우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번엔 조금 옅어진 홍차 빛, 장미꽃 같은 부드러운 색이 나와 마음이 놓인다. 향도 알맞다.
첫 잔보다 두 번째 잔이 더 그윽하다.

이 맛, 이 향을 음미하며 다시 바라본다. 누군가 말한 여유란 이런 것인가.

직장 다니던 시절, 여유는 늘 꿈이었다. 피곤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던 주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막상 경제 활동을 멈추니 이상하게도 조바심이 올라온다.
굶어 죽을 일 없는데도, 내 안 어딘가 숨어있던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충분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나는 왜 더 채우려 하는 걸까?

마음의 살을 찌우려 차를 마셨는데 되레 잡념으로 가득 찬 바보가 된다. 비 오는 날은.

그래서 더 꿀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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