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혼자 있다.
곁에 아무도 없이 무정의 사물만 눈에 보이고, 방안 물건들이 몹시 낯설다.
이제 겨우 이틀째, 마음이 오락가락을 반복하면서도 몹시도 기다렸던 시간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이 먹어서 또 객지 생활을 반복하고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머리 무겁다. 말이 필요 없어진 공간에서 입을 닫고 시간을 붙들고 있으려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모처럼 방해받지 않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이 감사하기도 하다.
인간은 가변적인 동물이 맞는 것 같다. 요모조모 머리를 굴려도 만족이란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차선의 선택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랫동안 마음의 부담을 안고 방 안에서 도서관으로, 다시 방으로 도돌이표 생활을 9개월여를 보내고 나서, 약간의 소득이 생기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이제 그 초입에 도착해서 그 시간을 보내며 이 공간에 머물고 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할양하여 속 뜰에 한껏 살이 붙고, 글이 정돈되며 정갈해지는 시간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인터넷 안 되는 것도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집중하고, 몰입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한 번에 몇 걸음씩 겅중겅중 뛸 생각은 없다. 천천히 걸음 하면서 딛는 걸음마다 생각을 정돈하고 세월에 걸맞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지금 맞는 순간은 내게 주어진 축복이 아니겠는가?
읽는 책도 변화를 주었다.
소설, 인문학과 철학 서적을 섞어 편독하지 않고 읽어 나아가되 싫증이 나면 즉시 멈추었다가 다시 진행하기로 하였다.
다행히도 읽은 것들의 잔상이 남거나 떠오르거나 하여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시간을 헛되이 소비한 것은 아니어서 자신이 기특해진다.
독서에 관하여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올해 5월부터 읽은 책 권수가 백 여권이 넘으며 마음속에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중 특히 도움을 준 책은 노자와 장자 관련 서적이었다.
한자 자체를 읽고 독해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전문가의 주석서를 읽고 마음의 풍랑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참으로 귀중한 만남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책이 마음의 양식이 된다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내 속 뜰에도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소비하는 독서가 아닌 살집 터진 상처를 메우는 독서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또한 글쓰기와 병행하면서 얻은 귀중한 체험이었고, 나를 채우는 소득이었다.
아직은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은 못돼도 거울 보고 웃을 수 있다. 구태여 남에게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내는 변한 것 없다고 단언할지 모르지만 난 이미 변화하려는 경계에 들어서 있다고 생각된다.
조금 늦게 가진 습관들을 꾸준히 가지고 나아간다면 몇 년 후엔 괄목 장대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가졌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무리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과욕이 심신에 끼치는 폐해는 겪을 만큼 겪었다.
내가 나를 반추해 가며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고, 그때 떠오른 글귀와 생각을 다듬어 낼 수 있다면 나름 기쁜 일이 아닐까?
물론 지금보다 더 많이 유연하고 유려해질 수 있으며 품위로 가득하고, 품격 있는 글이 종이를 수놓을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시간은 덧없이 흐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또는 무엇인가를 해도 시간을 보내는 것은 똑같다.
만고의 진리를 이제 사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도 알았고 가끔 느꼈던 바지만 지금은 머리에 와닿는 정도가 강 하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물처럼 담과 소를 만들며 파고 들어간다.
물에 물을 섞어도 거품이 일고, 하늘로 용솟음하듯이 아주 가끔 마음과 생각이 안정되며 평안해질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독한 혼자가 만들어 주는 쾌적한 즐거움이다.
등짝 서늘한 외로움이 주는 소름 돋는 까칠함이다.
글을 씀으로써 알 수 있는, 글쟁이처럼 느끼고 싶은 사치다.
전신에 돋는 소름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어본다.
길고 행복한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