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다. 추워서 그랬다. 방은 전기장판을 깔아 놓은 침대를 제외하고는 냉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어깨로 내리 찍히는 냉기를 어쩌지 못해 얼굴마저 두꺼운 이불 속으로 감춰 두어야 했다.
일요일 저녁 00에 내려오자마자 숙소 주인에게 방을 바꾸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107호실이 비어있는데 혹시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주인의 대답이 단칼에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 방은 깨끗하게 관리해서 3만 원씩에 대여하는 방이라고 했다. 알겠다고 말하며 그러면 방에 전기난로를 켜서 위풍을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여주인이 이곳 특유의 느릿한 말 걸음을 제쳐두고 입에 침을 튀겨 가면서 답하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아직 그렇게 춥지 않은데 손님만 유독 추워하느냐? 그래서 다른 방 손님에게 주지 않는 전기장판을 깔아주고 두꺼운 이불을 주었는데 그걸로 견디어 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기 요금이 너무 많이 올라서 요금 내기가 버겁다는 것이었다. 손님이 전기장판을 끄지 않아서 하루에 전기 요금이 팔천 원이 나온다는 다소 해괴한 논리를 가지고 무조건 전기난로 사용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방도 못 바꿔준다. 전기난로 사용도 안 된다고 하면 어찌하란 것이냐? 고 반문하였다. 밤 10시가 넘으면 심야 전기가 들어와 방바닥이 따뜻해지니 참으란다. 이때도 숙소 주인의 말에 어폐가 있었던 것이 주인과 내가 실랑이한 시각이 밤 10시 40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시라고 지금 시각이 10시 40분인데 방바닥에 냉골이 돌아 양말을 벗지 못하겠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들었다. 자다 보면 따뜻해질 거란다. 차라리 말문을 닫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말을 꺼내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쇠귀에 경 읽기란 이런 경우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자본주의 더군다나 자신에게 국한된 개인 자본주의 앞에서 철저히 부수어졌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다른 사람의 불편이나 애로 사항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동설한이 되면 보일러를 두 대 돌려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 주겠다고 한다. 이것은 숙소 주인의 난방에 관한 주장이었고 현재 상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블랙박스랄까. 의뭉스러워서 속이 안 보여요. 잠시 관광하다가 돌아가는 외지인들의 눈에는 여기 사람들이 어수룩하게 보이겠지만, 다들 속으로는 계산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 속 문장이 불현듯 생각났다.
오늘은 피곤하니 잠을 자고 내일부터 차분하게 지금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추우니 이불을 뒤집어쓸밖에.
축적 자본주의란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이의 불편이나 애꿎음을 자신의 작은 이익의 축적 기회로 삼는 것을 말한다. 혼자만의 정의다. 실제로 생활하다 보면 이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지난 40여 년의 노동이 대표적인 실제적 예고, 내가 가진 불편 부당한 경우의 수를 모으고 모아서 소유주의 경제적 축적에 상당한 기여가 됐으리라고 하는데 이견이 없다. 실질적으로 이런 노동 제공이 없었으면 나와 가족의 생활 근저가 없었을 것이란 데도 이견은 없다.
나의 일과 후 노동에 대해서 휴일 근무에 대해서 누구도 대가를 지불한 자가 없었다. 심지어 나의 노동에 대하여 당연시하고, 그것을 애사심 또는 충성심으로 미화하고, 포장하기 바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결여는 당연히 모든 자신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기망하고 있었다. 나는 해당이 안 되고 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일이다.
자본주의 교육의 결여라 생각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발상지인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만이 먹이를 저장하고 감추어 두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무릇 모든 화는 욕심과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성현들이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인간이 있는 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일과라 생각된다.
이제 나이 먹어 가면서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해야지 하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인간인지라 언제 그랬냐는 듯 조변모개함은 내가 사람의 탈을 쓴 것이 분명함을 일깨워 준다.
살면서 특히 젊은 날엔 욕심도 필요하다. 경험으로 알게 된 정의란 생각이 든다. 무위자연을 노래한 노자처럼 살면 지금처럼 험한 세상에 선 젊은 친구들에겐 누워 잘 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갈수록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말 중에 가장 어려운 적당함 또는 대충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은 실제 매우 어렵다.
그중 가장 어렵고 난해한 것은 나의 정의와 너의 욕구가 첨예하게 부딪힐 때 서로가 불편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정서적 균형점 찾기다.
네가 손해 보고, 내가 피해를 입는 구조라면 어느 쪽도 즐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여 살면서 손해가 아니라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엄동설한에 추위가 조금은 가실 수 있을 것 같다.
추운 방안에 누워 대책을 강구해 본다. 다른곳의 방을 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