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창 밖으로 쏟아지는 함박눈이 보인다. 날이 구물 구물 하여 온통 회백색으로 점철된 하루 중 오후를 보내고 있다. 길은 눈이 내리면서 촉촉하게 젖어 번들거리고, 양옆 상점들의 불빛을 받아 바닥에 투영하고 있다. 날이 추워서인지 다니는 사람은 없고 겨울바람만 바닥을 쓸며 지나가고 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객지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차례의 경험이 있다고 하여도 매번 다른 감정과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내 마음의 일관성이 부족해서인 것 같다. 나는 같은 사람인데 주변과 주위의 사람들이 바뀌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을 소화하지 못해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갖는 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듯싶다. 사람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나 행동이 다르겠지만 난 유독 환경 적응 능력이 떨어지는 객체가 아닌가 싶다. 학습 능력도 부족하고, 타인과의 관계 설정도 잘 못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조차 한 참 부족한 사람이다.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거나 가진 불편함을 이른 시간 내에 소화해 내는 여유는 내게 없다.
늘 처음이 어렵고 힘들다. 이 사람은 이래서 힘들고, 저 사람은 저래서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가진 장애 아닌가 싶다. 일부러 핑계를 찾아, 못하는 것에 정당한 근거를 부여하려 애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긍정의 힘과 영향을 느끼고 봐왔다. 지행합일 하려는 뜻을 가지고 순기능에 기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나도 타인도 서로 평안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실천하기엔 무엇인가 주저하게 되고 순둥순둥 해지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경험도 충분하고, 인위적 교육도 받았지만, 선뜻 나서려면 주저하게 되는 것은 마음속 경계심이 도드라져서 일 것이다. 며칠을 봐도 데면데면 해 지는 얼굴들과 마주하면서, 감정의 기복과 교차를 느끼게 되는 지점이라도 발생하게 되면 상황 정리가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가족 간에도 감정의 소통과 교류가 쉽지 않을진대 더더욱 타인과의 관계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사람은 매일 이러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족의 경제적 운명을 책임진다.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도드라진 문화에 적응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 폐쇄적 원시 사회가 아닌, 거대 자본의 팔과 다리로 살면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나마 생각을 끄적이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까지가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일탈이 아닐까?
내가 가진 내 정신세계는 자본과 타인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마지막 성역이다.
현대 자본과 주위에 혼재한 타인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타자의 자유에 무관심하기 때문인데 슬픈 모습은 이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며 화폐와 금전적 욕구에 쉽게 침식당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적당한 경제적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 인간이 살면서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세태는 이것만 가지고는 사회적 인간으로 대우받고 대접받을 수 없다.
나이를 먹고 나서도 이런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창 가족의 안위를 위한 경제생활을 하는 젊은 세대에게 이 감정과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이랴. 마음을 다듬고 생각을 한숨 쉬어가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도, 나 역시도 젊은 날에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걸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을 얼추 간주할 수 있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은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게 물처럼 흐르는 게 제일 좋다. 적당한 율동을 가지면서 골진 곳에 흐르는 물은 채우고 넘쳐야 다음 행보를 이어간다.
지금은 추위가 한창인 겨울이다.
겨울에도 인간의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서는 시원한 물 한 그릇이 필요하다.
물은 인간이 생활하기 위한 필수재다. 급하다고 벌컥벌컥 마시다 보면 물에 체해 더 고생할 수도 있다. 물을 마시는데도 부드러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천천히 부드럽게 마시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준비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다음 것들을 살펴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내가 자란 곳과 다른 객지에서 보내는 겨울은 어깨가 시리다. 나를 받쳐줄 아무도 없는 타향에서 자신의 정신세계가 함몰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몇 차례의 경험에서도 이를 통감했지만, 극복하려는 의지만으로 헤쳐 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실천적 생활 변화가 필수적이다. 오히려 허락된 혼자만의 시간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생각의 침잠이 필요하다. 발전적이고, 자기 성찰적 각성을 누리려는 노력을 위해서 책을 읽고 깊은 상념과 고독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바라보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객지 생활에서도 필수재를 찾고 보충하여 다가올 봄꽃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겠다. 웅크리고 있는다고 몸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가슴을 펴서 신체 각 곳에 혈액을 돌게하고 순환시켜야 마음에도 훈기와 영양이 돈다.
객지 생활이 내게 주어진 과제요 생활환경이라면 이를 기회 삼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알아 나를 천천히 담금질하고, 채근하자. 그리하여 나를 평안하게 만들고, 가족에게도 그 기운을 전하며 주변에도 불편하지 않은 정서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시작된 겨울은 봄이 되면 사람의 마음과 자연을 풀리게 하고 화색이 돌게 할 것이다.
한편 객지 생활도 설정된 기간이 끝나면 종료될 것이고 이 또한 내 생의 한 자락으로 이력서 한 줄에 기록될 것이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고, 상처가 남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
나만 겪는 계절이 아니기에 같은 추위를 맞고 시간을 보내는 자연에 묵언으로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