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정원

by 서장석



바람이 분다.

계피 향 머금은 바람이 분다. 이런 바람이 불면 겨울이 머지않았다.

메타세쿼이아 나뭇잎이 흔들리며, 굳게 감추어 두었던 지난봄의 까치집을 슬며시 보여준다. 올봄 부부 까치의 노력을 보았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튼튼하고 야무지게 지어놓은 집은 어떤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을 듯했다.

능선을 넘은 바람이 계곡을 타고 저수지를 건너오더니, 건물에 부딪혀 굉음을 쏟아냈다. 청명한 가을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데 바람만 괜스레 심술을 부린다. 하늘을 나는 바람은 막힘이 없어 한없이 자유롭다. 반면 나무 기둥을 감싸며 지나가는 바람은 이곳저곳에 소식을 전하느라 느릿하게 흐른다. 어떤 바람은 한 곳에 머물러 이야기 손님을 맞듯 기다림의 줄을 세우기도 한다. 귀가 열린 이에게는 듣고 본 것을 감춤 없이 설명한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은 이에게는 아무리 속삭여도 그저 소슬한 기운으로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나는 바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먼저 다가와 냄새와 소리로 자신을 밝혀 왔다. 모습은 없지만, 살갗에 스치는 온도와 소리, 냄새와 이름으로 그 존재를 알려왔다. 태풍, 폭풍, 미풍과 하늬바람 그리고 높새바람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미친 듯 휘몰아치는 그의 모습과 때로는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보이기도 한다.

종잡기 어려운 바람의 속성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는 바람 탓을 하며 위안을 얻고, 바람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나간다. 바람은 너그럽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대자연의 속성 그대로, 인간의 사소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가고 다시 올 뿐이다.


한 그루 나무에서도 바람은 다른 표정을 남긴다. 꼭대기는 흔들리며 허공에 말을 걸고, 가운데는 저항하듯 잎을 흔든다. 바람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일수록 더 크게 흔들리는 법이다.

분명 저 멀리 보이는 능선에도 바람이 불 텐데 육안으론 보이지 아니하여 구별할 수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가까이 보이는 것만 허락하고, 마음결을 거쳐야만 더 먼 것을 보게 만든다.

마음이 깨이고 열려있어야만 먼 곳의 바람이 보이고, 그 소식에 심성을 기울일 수 있다. 자연의 심술 앞에서 인간은 눈과 귀를 닫은 듯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

삶에 급한 이에게 바람은 그저 날씨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의 언어를 들으려는 사람에게 바람은 삶과 마음을 이끄는 힘이 된다. 바람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로 하늘의 뜻이 바람에 섞여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기운은 바람을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바람은 좋고 나쁨을 가르지 않는다. 바람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나비의 날갯짓에 살짝 힘을 보태 그 가벼운 비행을 받쳐줄 때다. 거친 숨을 감추고, 나비의 마지막 비행을 위해 말없이 힘을 보태는 바람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하늘로 올라간 나비의 소식이 궁금한 건 인간이 가지는 욕심일 뿐 바람은 돕고도 도와준 줄 모른다. 자기가 가지는 역할에 충실할 뿐 나머진 세상에 맡겨두었다.

나뭇가지 끝에 가을이 매달려 있고, 겨울을 준비하는 바람의 동량이 숨겨져 있다.

가을밤 별빛은 바람을 만나 일그러진 채 땅으로 내려온다. 구부리고 숙인 얼굴로.

정원으로 모여든 별빛과 낙엽과 인간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며 서로가 잠들지 못하는 밤. 그 소리 속에서, 바람은 자연과 인간을 한데 모아 또 하나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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