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시대의 영웅

by 서장석

TV를 켜자, 고척돔의 불빛이 거실을 덮었다. 스크린 너머에서 만 팔천 개의 숨결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 조용필이 서 있었다. 화면 속 그는 시간의 무게를 걸쳐 입은 사람 같았다. 화면 속 조용필은 칠십이라는 숫자 대신, 자신이 걸어온 시간의 묵직함을 목소리에 실어 무대를 떠받치고 있었다.

첫 음이 돔의 천장을 울렸다. 마치 오래전 내 가슴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빛이 갑자기 켜진 듯했다. “단발머리”가 시작되자, 화면 속 관객들은 하나의 파도처럼 흔들렸다. 응원 봉이 빛의 물결을 만들고, 그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그곳, 저 거대한 숨결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한 곡 부를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데려갔다. 잊었던 청춘이 손을 흔들듯, “돌아와요 부산항”이 흐르는 순간, 화면 속 어느 관객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 장면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울고 있는 관객의 얼굴보다, 그 울음을 가능하게 하는 노래의 힘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동안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이 그를 ‘영웅’이라 부른 이유를 그때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영웅은 전쟁터나 신화 속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고비마다 흔들리는 우리를 묵묵히 붙잡아 준 목소리도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조용필은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에게 기적을 건네고 있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은 어느 순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폭발하는 신시사이저, 관현악의 밀려오는 파도, 교복을 입은 군무, 그리고 그 가운데 흔들림 없는 그의 가성. 부드럽게 퍼졌다가 갑자기 날카롭게 솟구치는 그 소리는, 마치 긴 겨울 끝에 예기치 않게 봄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처럼 가슴을 흔들었다.
나는 알았다. 이 목소리를 위해 그는 하루도 예외 없이 목을 단련했다고 했다. 한 시대를 만든 사람이 매일 시작점에 서서 자신의 한계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실 앞에서 나는 갑자기 작아졌고, 부끄러워졌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하루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래며 살아온 날들이 떠 올랐다. 조용필이 무대에서 쏟아내는 힘과 숨, 그의 일관된 자세가 나를 조용히 흔들었다. 관객의 환호보다도 더 크게, 그의 존재가 내 내면을 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화면을 바라보는 단순한 시청자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 앞에 서서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청중이었다.

쇼가 끝나 갈 무렵, 카메라는 그의 모습을 크게 잡았다.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가 걸어온 날들을 증명하듯 선명했다. 그가 노래하는 동안, 스크린 밖의 나까지도 그 흔들림 속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2시간 40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내게는 청춘과 중년이 뒤섞여 지나간 한순간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나는 화면 앞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 시대에, 이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운이구나.

그는 대중가요를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말보다, 스스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쌓인 목소리,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 흔들림 없는 태도. 그것이 한 영웅을 만들고 있었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엔딩 크레디트가 흐를 때, 나는 알았다. 내가 잃어버린 어떤 것—열정, 연습, 꾸준함의 힘—그 모든 것을 그는 다시 환하게 불러냈다는 것을. 사랑하는 영웅에게.
그의 노래가 내게 남긴 울림은, 잃어버렸던 열정과 연습, 그리고 꾸준함의 힘을 다시 환하게 불러낸 하나의 기적이었다. 이제, 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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