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

by 서장석

배가 피레우스항을 벗어나자, 바다는 서서히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행의 첫날은 늘 낯선 물결에 마음을 적셔 보는 시간이다. 검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 곳. 어느 순간, 오랫동안 닿지 못했던 감정이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배를 탄다는 것은 심신을 지치게 할 수 있지만, 산토리니에 대한 꿈이 이것을 견디게 해 준다. 선미에서 흩어지는 하얀 거품이 이국의 문을 틔우듯 멀어져 갔다.

배가 도착했다. 올려다본 절벽 끝이 아득하다. 옛날에는 저 길을 걸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절벽을 돌고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바다는 항구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 호텔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아담한 호텔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끄는 멋이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다를 보러 나갔다. 배 위에서 보았던 색보다 더 짙고 깊은 물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생명의 기척마저 밀어내는 듯한 그 깊고 거대한 위엄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한순간 무력해졌다. 바다를 바라보며 먹던 오징어구이와 샐러드, 그리고 쌉쌀한 맥주는 그날의 저녁을 완성하는 작은 의식이었다.

밤바람이 차가워져 숙소로 돌아갔지만, 난방이 작동되지 않았다. 직원이 와 문이 조금만 열려 있어도 난방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행지에서는 이런 사소한 일마저 하나의 추억이 된다. 샤워를 마치고 술 한 잔 더 마시고 나니 긴 하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튿날 드디어 본래 목적인 산토리니 관광에 나섰다. 이아(Oia) 마을로 출발. 버스에 탑승한 서른 명 눈이 반짝인다. 마을 도착 후부터 시작된 눈동자의 부지런을 몸이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능선을 따라 길을 내고 절벽의 경사면에 집을 지어 거리를 만들었다. 인간의 노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말해 주는 역사요 기록이었다.

광장에서 오른쪽 끝에는 성벽이 있는 낙조 전망대가 있다고 한다. 왼쪽으로는 교회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천천히 관광에 나섰다. 파란색 돔 지붕 3채가 모인 장소가 있다고 하여 사진 명소를 찾아가던 중 아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로밍도 되어 있지 않아 골목을 대여섯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찾아보았으나 오리무중이었다. 순간 걱정이 되었고, 황당함과 화가 뒤엉켜 가슴을 휘저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길은 하나뿐이니 결국 마주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골목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여행이란 결국 서로에게서 잠시 멀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여행의 묘미를.

성벽 전망대로 혼자 걸어갔다. 극한의 험지에 삶의 터전을 일구고, 거친 자연과 벗해 만들어낸 인간의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곳에서 바라본 에게해는 명품 중 명품이었다. 윤슬이 눈부셨고, 오면서 보았던 바다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인간의 상상을 무한히 자극했다. 그 찰나의 광경 앞에서야, 내가 이 먼 길을 온 이유가 선명해졌다.

잠시 쉬었다가 전망대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아내와 헤어진 장소에 도착했다. 그때 골목에서 갑자기 아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사람을 보니 반가웠다. 어떤 말이 돌아와도 감정을 조절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나타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자연스레 팔짱을 끼어 왔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섰지만, 발걸음은 무거웠고 쉴 곳이 간절했다.

다리 쉼 하려고 들어간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어도, 거리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패션쇼처럼 살아 움직였다.

해가 바닷속에 잠겨질 시간이 되었다. 낙조 명소라는 곳까지 가기에 사람도 많고,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고 허기가 몰려왔다.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문어숙회, 소고기야채말이와 파스타를 주문하고, 산토리니 맥주 동키를 부탁했다. 음식은 맛이 있었다. 다만 파스타는 쌀알 모양의 면에 수프 같은 소스가 얹혀 나와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릇 세 개를 말끔히 비웠다.

식사를 마침과 동시에 해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며 수평선에 낙조만 남기고 사라졌다.

태양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천체의 일과를 나도 함께했다. 모두가 자연임을 깨닫게 해 주는 이런 광경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건 아닐까?

밤빛을 머금은 산토리니는 말문을 닫게 한다. 화려했던 낮이 가고, 해가 잠기고 다시 불빛이 피어나는 하루 속에서, 섬은 마치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완성해 우리 앞에 내놓는 듯했다. 그 앞에서 사람은 숙연해지고.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어둠 속에서, 낮 동안 잃고 찾았던 순간들이 조용히 반짝였다. 여행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멀어졌다가 다시 붙여 보는 마음의 일과였다. 그때 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섬의 진짜 풍경은 바다도 하늘도 아닌, 하루 동안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우리 사이의 거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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