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발견

취향의 발견 1 - 작은 사치, 평범한 일상을 풍요롭게

by seojunwoo
잊지 못할 향기


나에겐 잊지 못하는 향기가 하나 있었다.

남자가 미련을 가지는 향기 하면 흔하게 떠올리는 것이 헤어진 여자 친구의 향수나 샴푸 냄새 같은 것들이 있는데 내가 잊지 못하는 향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군 복무 시절 처음으로 알게 된 B사 애프터 쉐이빙의 향기...

때는 바야흐로 병장 시절, 부대 내부 사정으로 같은 곳에 복무하던 부대의 모든 사람들이 타 부대로 옮겨갔어야 했다.

그때 개인 물건들을 정리하다 누군가 포장 박스를 뜯지도 않은 채 관물대 서랍에 두고 떠난 B사의 아쿠아틱 로션 애프터 쉐이빙 제품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하 애프터 쉐이빙)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애프터 쉐이빙은 매일 아침 면도를 끝내고 손에 덜어 바를 때마다 마치 햇빛 좋은 날 잔잔한 대서양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보트 위에서 시원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서양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남자 모델 데이비드 간디 David Gandy가 나오는 광고의 한 장면이 대서양 어디쯤 되려나 생각했다. - 여담이지만 다음 생애엔 꼭 그런 비주얼로 태어나야겠다.)

또 한편으로는 눈으로 봤던 애프터 쉐이빙의 병 색깔이 왜 그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는지 향기로 표현이라도 한듯했다.


하지만, 처음 접한 한 병 이후로 나는 다시 애프터 쉐이빙을 구입하지 않았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왜? 간단하다.

전역 이후로 평범한 대학생 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기본 로션이나 스킨도 아닌 200ml 한 병에 4-5만 원을 오가는 고가의 '화장품'을 구입하는 것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깔끔, 근검절약 김여사


평범한 남자 대학생에게 4-5만 원짜리 화장품은 비싼 물건이기도 하지만, 나에겐 그것을 선뜻 돈 주고 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나의 모친이신 김재순 여사(이하 김여사).

김여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부지런함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다.

그리고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기준치가 상당히 높으신... 한 마디로 전교 1등과 같은... 분이다.

(한 번은 명절에 본가에 내려갔다가 각 잡혀 걸려있는 옷장 속 옷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집에 있을 때에도 눕는 법이 없으며, 항상 집안 일로 바쁘다.

집안 살림도 내가 보기엔 최소 이틀 뒤에 해도 충분할 것 같은 일들인데 미루는 법이 없으며 눈에 보이는 즉시 해치우신다.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다는 것은 김여사가 아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로 김여사는 바쁘게 움직이다가 아프고 몸이 좋지 않은 경우에만 누우신다.


부지런한 김여사의 근검절약에 대해서 짚어보자면...

윤택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을 고려하여 조금 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긴 하나...

생활 전자제품의 전기 코드는 그 기기의 사용이 끝나는 즉시 뽑는다.

예를 들자면 선풍기를 같은 날 한 시간 뒤에 다시 사용하더라도 일단 지금 사용할 만큼 다 썼으면 전원을 끄는 것은 물론 전원 코드까지 뽑아버린다.

집에서 전자제품을 사용하려고 전원을 누를 때마다 한 번에 켜지지 않아 철없는 아들내미에게는 그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뿐이었다.

한 번에 켜지지 않는 전자제품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지구 온난화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김여사 본인 심신의 평안을 위해서인지 웃으며 넌지시 물어보고 싶었다.


이런 배경이 있으니 나에게 애프터 쉐이빙이란 것은 사치라는 단어를 6글자로 풀어쓴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취향의 발견


제주도에 친구가 챙겨 온 B사 제품을 재미 삼아 묵었던 숙소 돌담에 놓고 촬영하였다. 아마도 이 사진이 나로 하여금 다시 애프터 쉐이빙을 찾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잊고 살았던 애프터 쉐이빙의 향기는 친구들과 갔었던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다시 내 기억 속에서 피어올랐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 공항 면세점을 별생각 없이 돌아보다가 눈에 들어온 B사의 매장.

그렇게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 돈 주고 B사의 애프터 쉐이빙을 구입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병의 디자인이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원기둥 형태로 업그레이드돼있었다.


이 한 번의 소비가 나에게 가져온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와 면도를 끝마치고 애프터 쉐이빙을 손에 덜어 얼굴에 촤악 쳐줄 때면 느껴지는 그 향기...

이른 아침 바쁜 마음으로 출근 준비하기에 분주한 그 시간대에 내 마음 한편 잔잔한 바다의 풍경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할 줄이야.

어쩌면 작은 사치일 수도 있는 나를 위한 긍정적인 소비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것이,

얼굴에 칼을 대는 짓인 면도를 하는 것이,

단 한 번도 기다려진 적이 없었는데 이 놈을 쓰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면도하기 만을 기다렸다.


저녁에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라 보았는데 왠지 느낌이 아침과는 달랐다. 한두 번의 저녁 샤워 테스트 이후, 애프터 쉐이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로 나는 아침에 면도를 한 뒤에만 애프터 쉐이빙을 사용하였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세수하기, 샤워하기, 음악 듣기, 책 읽기, 회사 내 자리에서 텀블러에 물 마시기와 같은 습관적이고 단순한 일상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고, 내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물건, 내가 조금 더 좋아하는 것들, 내 취향에 조금 더 가까운 스타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내가 그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일상에서 하나씩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평범했던 일상을 기다려지는 특별한 순간으로, 단순했던 일상을 풍요로운 생활로 만들어준다.


소비 패턴은 개인의 취향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가성비에 중점을 둔 소비를 벗어날 때 단순한 소비자, 구매자를 넘어 한 명의 개인으로써의 취향이 발현된다.

그래... 입에 쓴 약이 몸에도 좋다고...

전원 코드를 뽑는 것은 누군가의 심신 평안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지구 온난화를 늦추기 위한 긍정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일 같이 쓴 약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 가끔.. 정말 가끔은 나 자신을 위한 긍정적인 소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약간의 사치로 별 것 아니지만 똑같이 반복되던 일상이 기다려지는 일상으로 변화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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