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과 오랜 이야기를 마친 공조팀이 저들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보았다.
'저들의 싸움은 끝난 것일까?' 시스템과 나눈 글들이 여전히 찜찜하게 남아있었다.
저들의 행동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들에게 그에 버금가는 고통을 주고 싶다던 이야기들과 잔인하긴 하지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악의 크기만큼 그들 역시 같은 고통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의 말처럼 정규 뉴스 시간에 저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내기로 하였다.
국회에서 반대 뜻을 표명했지만, 언론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자 이제 집에 갑시다.]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가자~ 돌아갑시다' 하며 먼저 한 말에 기운을 보탰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 유독 얇은 목소리가 들렸다.
[90층 보상 먼저 봅시다.]
데이비드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보상받기를 선택하였다.
기존의 보상보다 하나가 더 늘어난 3개였다.
평범해 보이는 칼 한 자루와 열쇠 그리고 생명수라는 것을 받았다.
[응? 이건 또 뭐야? 확인]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기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받은 칼에 시스템이 들려준 건 조금은 진부한 내용이었다.
[현실의 세계로 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현실 세계 진입 후 사라집니다]
이 말은 마지막이 한번 더 남았다는 의미와 동시에 그것을 통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시스템이 알려준 것은 열쇠였다.
[현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사용되며 사용 후 사라집니다]
시스템이 열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박수소리가 들렸지만 누구의 박수 소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마지막으로 받은 생명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여러 곳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죽음마저 살릴 수 있는 물약으로 모두 마셨을 때만 생명을 살릴 수 있으며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와 ~ 역시 대박! 생명수라니 으하하]
또 한 번 환호성이 나왔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시스템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들은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99층으로 향했다.
90층 이후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곳이라 준범이 말려보았지만 이들을 통재할 수 없었다.
준범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림자보스 이후 출몰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90층 이후의 길은 지금까지의 길과는 사뭇 다른 지형이었다.
좌우가 막혀 오로지 직진만 가능했다.
좁고 긴 동굴 같은 느낌의 길이 답답하게 느껴졌고 길이 울퉁불퉁했지만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조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지만 그들의 조급한 마음까지 삼키지는 못했다.
[저기 출구가 보입니다.]
앞장서던 현준이 뒤를 돌아보며 외치자 따라오던 일행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출구를 나오자 강한 빛이 시아를 가렸지만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빛이 적응되자 넓은 광장 한 복판에 오래된 목재건물과 그곳에 있는 늙은 노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건물입구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노인이 원정대를 목격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루한 복장에 흰 수염이 명치까지 내려와 마치 영화 속 간달프 같은 느낌도 주었다.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체격에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오리스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이 들었다.
[어서 들오세요. 반갑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오셨군요]
[이제 여러분은 마지막 단계인 세상의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곳을 지나면 여러분의 세상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제가 안내하지요]
오리스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쪽으로 들어선 원정대는 다시 한번 눈을 의심했다.
문을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곳은 숲이었다.
이리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 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바위와 마주했다.
바위에 여러 명의 손자국이 각인되어 있지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영화인들이 바닥에 새겨 넣은 핸드프린팅 같은 느낌이었지만 바위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조금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한분씩 절 따라오세요]
기태가 가장 먼저 그를 따랐고 그 뒤로 현준이 뒤를 이었다.
바위를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각인된 손바닥들 사이에서 대원의 손바닥을 찾아주던 오리스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이제 여러분은 각자 자신의 문으로 들어가실 겁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무장이 해제되며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여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모두 제거하셔야 여러분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문이 생기고 그곳을 통해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모든 생명은 죽여야 합니다. 그럼 모두 건투를 빕니다.]
오리스가 사라지고 각자의 손바닥에 자리한 일행이 자기 손바닥을 바위에 새겨진 손바닥에 가져가니 열쇠 구멍이 생겨났고 열쇠를 들이미는 순간 각자 다른 세계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흘러들었다.
기태가 흘러들어 간 시간 속 공간에서 그는 망연자실하며 자리에 주져 앉았다.
기태는 그곳에서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오열하며 말했다.
[이들을 죽이라고? 미친 거 아니야? 나더러 내 가족을 죽이라는 말이냐?]
[아빠! 왜 그래? , 여보 무슨 일 있어?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15년 전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으로 들어온 기태는 다가오는 가족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한편 그 시각 이마리는 자신의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여기는 옛날 내 방 이잖아!]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이불과 필기구의 감촉을 느끼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던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마리야~]
[엄마?]
마리가 서둘러 방문을 열자 어머니가 그곳에 서 계셨다.
달려가 엄마품에 안기어 한동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엄마의 얼굴을 매만지던 마리가 뒤늦게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의식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기 전 오림의 말이 생각났다.
화들짝 놀란 마리가 어머니를 밀쳐내며 현실을 부정하였다.
[안 돼 ~ 아악 안 돼~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안 돼~]
그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대부분 자기 가족이 찾아왔지만, 준범만이 몇 명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왔다.
[어이~ 브라더~,야 범아!, 잘 지냈냐?]
[너희가 어떻게...]
준범은 보육원 출신이다. 잠시 입양되어 살았지만 거친 성격 탓에 파양 되었다.
그런 준범에게는 보육원 친구들이 형제고 가족이 있다.
준범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이런 친구들을 자신이 죽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미션을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준범은 달아나는 쪽을 택했다.
차라리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저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생각에 마냥 내달렸다.
하지만 한참을 달아나도 친구들은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았으며, 너무나도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괴로워했다.
일행 모두가 연인을 가족을 그리고 친구를 죽여야 한다는 괴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때 보상을 줄 때마다 들려오던 기계음이 들려왔다.
친절하게만 느껴지던 기계음이 이번에는 너무나도 사악하게 느껴졌다.
# 현준
그동안 친근하게 느껴지던 기계음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순간 도리어 사악하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당신은 타인에게 주었던 고통의 크기만큼 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당신의 따돌림과 폭행으로 젊은 사내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남겨진 가족의 슬픔에 비하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신의 오만과 독설이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나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막내 현준이 오열하며 하늘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호진
한편 옛 연인을 만난 호진은 그녀를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오지 마! 오지 마!]
[왜? 사랑한다며 한시도 떨어지면 불안하다며 이제는 내가 싫어진 거야?]
[너는 이미 죽었어]
[아니! 그렇지 않아 난 네가 있는 한 죽지 않아 이제 시작이야! 긴장해!]
호진이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어디든 나타나 호진을 괴롭혔다.
그런데도 달아나려 하자 그녀는 호진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렸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호진은 달아났다. 지금껏 그랬든 달아나는 호진을 어느새 따라잡은 그녀가 이번엔 그의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뜨린 후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끌려가는 자기 모습을 거울로 확인한 그는 그 모습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모습을 기억해 내며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다.
[아아악! 잘못했어 이러지 마! 이건 집착이야!]
그를 끌고 가던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호진을 향해 소리쳤다.
[하하하! 나도 그랬어. 지금의 너처럼, 집착이라고 그만하자고 하지만! 너는 어땠니? 우리 부모님마저 죽였어. 그런데 인제 와서 그런 말이 나와? 뻔뻔한 거니 무식한 거니?]
[미안해! 하지만 더는 이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그녀가 호진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때 호진은 가지고 있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을 바닥이 집어삼키듯 밑으로 끌어내렸다.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갔다.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느꼈을 찰나의 느낌일 뿐 현실의 변화는 없었다.
그가 찰나의 시간을 마저 느끼기 전에 참기 힘든 현실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녀가 호진이 가지고 있던 생명수를 이용해 다시 그를 살렸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말했지 이제 시작이라고 너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야 날 벗어나지 못해 영원히]
이때 시스템의 알림과 그의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말로 한 가정을 몰살시켰습니다. 당신의 어긋난 사랑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악! 아아악!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차라리 날 죽여줘]
그의 울부짖음 때문에 시스템의 소리가 묻혔다.
# 마리
[가족을 살해한다는 것은 천륜을 어기는 겁니다.]
[물론 살아온 환경이 불우했다 하더라고 충분히 다른 선택이 가능했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네가 뭘 알아! 그 사람은 죽어도 싸 아주 그럴만했어.]
시스템이 이야기하는 동안 마리가 끼어들어 항변하였지만, 시스템은 대응하지 않고 자기 말의 계속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죽인 2명의 자매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갔지만,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딸이었습니다.]
[당신의 부모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듯 그들 역시 그런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어떠셨나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딸의 죽음에 아파하던 부모님의 마음을 당신이 짐작이야! 하겠습니까. 이제 당신은 그 반대의 관점에서 그들이 느꼈던 고통의 무게를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통보에 가까운 시스템의 말이 이어지자 이마리가 오열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걔가 먼저 그런 거야 내 남자 친구를 빼앗은 건 그쪽이 먼저였다고. 그리고 죽을 줄 몰랐어]
[나 역시 사과받지 못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짓거리지마~]
[자기 합리화일 뿐 그렇다고 모두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죽을 줄 몰라서 정말이야.]
그녀가 울부짖었지만, 시스템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 준범
[너희가 올만 한 곳이 아니야 어서 이곳에서 나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친구들은 어리둥절해할 뿐 오히려 소리 지르는 준범을 달래려 하고 있었다.
[야~ 왜 그래?]
[재발 나가 부탁이야.]
그때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친구들이 소중한 것처럼 당신의 장난으로 망가져 간사람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 혹은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둘 중 일부는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또 일부는 열심히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에게 마약중독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하였으며 그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당신의 선택은 번번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파탄 난 저들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으니 당신 역시….]
[그만!]
[제발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이곳에 오고 난 후 준범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일행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으로 절망하며 오열하고 있을 때 다시 기계음이 들려왔다.
[이제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그들을 죽이고 한 칸 전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그것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고통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잔인한 방법으로 치르고 있었다.
아무리 허상이라 하더라도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죽이는 것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허상에 의해 절규했으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들이 받은 생명수에 의해 죽음마저 선택할 수 없는 잔인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 이재형 형사
TV 화면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달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항의전화도 받았다.
시스템의 말대로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조차도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난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하였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들의 마지막 미션 후 시스템은 사라졌고 더는 몽환 병으로 들어오는 환자들도 없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4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간혹 누군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떠돌긴 했지만 대부분 거짓 뉴스이거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했다.
혹자는 그들이 양심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결국 죄책감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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