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by 서기선

바람이 한 번 불고 나면
나무들은 조금씩 가벼워진다.
떨어진 잎은 흩어지며
나무는 자신이 머물렀던 계절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대도 어느새 그렇게
몸에 붙어 있던 시간들을
일렁이는 바람에 털어낼
나이가 되었다.


한때는
놓지 못해 무거웠던 것들이 많았다.
붙잡아야만 살아 있는 줄 알았고
쥐고 있어야만 지켜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은
손아귀에서 힘을 빼는 법을
알려주었다.


힘을 뺀 자리에서
비로소 쉬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마음이 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짙어졌다가
가을엔 스스로 가벼워져야만
겨울을 견딜 수 있듯,
사람의 마음도
계절을 따라 익어가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이 듦은 쇠퇴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는
자연의 이치였다.


그래서 더는
잃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잃는 만큼 비워지고,
비워진 만큼
새로운 바람이 드는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바람이 차갑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늦가을 햇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나는
내 안에서 서서히 빛을 줄여가는 일까지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빛이 줄어든 자리에는
그늘을 아끼는 지혜가 깃들고,
그늘에 익숙해진 마음은
더 멀리 있는 빛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내게 남은 계절을
조용히, 고요히,
그리고 단정히 살아갈 뿐이다.
마지막 잎 하나 떨어지는 날에도
미련 대신 미소로
내 계절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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