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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Sep 05. 2024

많고 많은 이름 중에 내 이름은 없다

다섯 꽃잎 라일락

요새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매일 지나던 길도 생전 처음 보는 듯이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멀리서 보면 그저 회색 도시일 뿐이지만 날씨에 따라 무뚝뚝한 도시의 표정도 조금씩 변화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놀라는 날의 연속이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강철과 벽돌로 뒤덮인 도시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풀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유독 자주 보이는 풀꽃들이 있는데, 그중 내가 아는 건 민들레뿐. 〈옥상의 민들레꽃〉, 박완서 소설 덕분이다. 다른 풀꽃들의 이름도 알고 싶어졌다가, 알지 않기로 했다. 아름다운 것은, 이름을 몰라도 어차피 아름답다.


유월의 첫째 날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다. 그날 아침에도 여전히 이름 모를 풀꽃들은 회색 도시의 사소한 균열들을 기어이 비집고 피어 나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닮아 있었다. 서울시에서 광장 사용을 불허하고 사람들이 아무리 거칠게 혐오를 쏟아내도, 지금 이곳에 이미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광장에서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축제장은 풀꽃을 촘촘하게 잔뜩 모아놓은 거대한 꽃바구니 같았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한낮을 보낸 뒤에 맞이하는 밤은 유독 캄캄하게 느껴지는 법. 낮 동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평소의 리듬을 되찾아 가던 그날 밤, 나는 문득 내가 꽃바구니 속에 섞여 들어간 이름 모를 잡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남자인가? 이제 난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난 날 남자로 느끼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남자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과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이 무례한 질문을 내게 가장 많이 던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남자가 아니라는 커밍아웃 뒤에 쏟아질 질문들에 대한 적당한 답을 찾기 위해서. 난 항상 내 정체를 명료하면서도 간결하게 설명해 줄 단 하나의 단어를 찾고 또 찾아왔다.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종류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자마자 수많은 설명이 쏟아진다. 그 설명을 읽고 또 읽어봤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 나는 없다. 나라는 존재를 말끔히 설명할 능력을 지닌 마법의 단어 같은 건 세상에 없다. 내 이야기는 결국 내가 써야 한다. ‘내가 쓴 내 이야기’ 그것이 바로 내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문 둘레에 많이 피는 꽃 ‘문둘레’. 민들레 이름의 유래다. 그런데 민들레가 문 둘레에만 피는 꽃이라면 산과 들에 핀 민들레는 민들레가 아니란 말인가?


개인이 느끼는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따라 성소수자의 유형을 나누고 분류하는 행위는 통일성을 바탕으로 무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형성된 무리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회로부터 성소수자를 지키고 자긍심을 드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다양한 존재가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중심으로 이름을 짓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어떤 이름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만들어 낸다.


이번 퀴어문화축제에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했다. 초국적 제약회사의 ‘퀴어 친화적’ 마케팅 이면에 존재하는 특허독점과 탐욕적 이윤추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재진행 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사실상 지원하는 중인 대사관들이 축제 부스로 참여한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시화의 축제인 퀴어문화축제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동물해방 없이 퀴어해방 없다’는 외침으로 축제 보이콧을 선택한 ‘인간 동물’들도 있다.


그들은 다양성에 한계 따윈 없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나도 그렇게 직접 내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5월의 어느 날, 라일락 향기에 이끌려 라일락 꽃잎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무언갈 발견했다. 꽃잎이 네 개 달린 무수한 라일락 무리 사이에 딱 한 송이, 꽃잎이 다섯 개인 라일락이 피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기묘한 유대감을 느꼈다.


이상한 라일락, 그래서 특별한 라일락. 특출나진 않은 라일락, 그래도 모자라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라일락. 그를 갖고 싶은 마음에 나는 그를 ‘톡’ 따서 일기장 사이에 끼워 넣고는,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다섯 꽃잎 라일락.


그런데 문득 오늘에서야 궁금해진다. 과연 그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을까? 혹, 이름 모를 존재로 그곳에 가만히 남아있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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