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말고 집으로 갑니다.당신을 거쳐 내 안으로 향하는 길
평소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늘 타고 다니던 자전거에 오른다. 오늘은 평소에 다니던 길을 지나 조금은 낯선 대로를 달린다. 한 나무에서 무성히 뻗어 나오는 크고 작은 여러 갈래 가지처럼, 크고 작은 골목들이 대로의 양옆을 무수히 가로지른다. 새로운 골목에 들어서면 잠시나마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당장이라도 핸들을 틀어 그 모든 골목길을 종횡무진 탐험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마음을 추스른다.
병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이웃의 집에 놀러 갈 때보단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병원에 일하러 갈 때보단 사뭇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들이 사는 집에서 당신들을 만난다. 당신들 중엔 장애인도 있고 장애인이 아닌 사람도 있다. 그 경계는 얼마나 모호한지, 어떤 장애인에겐 작업치료가 필요 없고 어떤 비장애인에겐 작업치료가 필요하다. 작업치료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치료받으면 신체기능이 회복될 거라고, 어두침침한 터널을 지나면 밝은 하늘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좋아지겠죠?” 묻는 사람들 앞에서 수없이 느꼈던 부끄럽고 참담한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배 작업치료사들은 “환자분들이 그런 식으로 예후에 대해 질문하면 잘 모른다고 해야 해. 그건 의사의 영역이니까. 의사의 대답이 네 대답과 다르면 어떻게 되겠어?”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과연 의사들은 그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병원에 그 누구도 없었던 건 아닐까?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작업치료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논문 내용은 대부분 이렇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치료를 받았더니 그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어떤 점이 낫더라….’ 그런데 여기서 낫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서양의학의 평가는 주로 쉽게 수치화할 수 있는 근력이나 관절의 가동 범위, 순발력, 협응능력, 지능, 기억력, 주의력, 계산력 등 신체의 기계적인 기능들에 중점을 둔다. 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이나 즐거움, 만족감처럼 주관적이고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들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되도록 배제한다. 그런데 치료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만 평가하는 게 정말 과학적인 걸까? 과연 숫자는 느낌보다 과학적인가? 내 생각에 서양의학은 근본 없는 숫자들을 이상하게 떠받들면서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10m를 걷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6분 동안 얼마만큼의 거리를 걸었는가. 이런 식으로 측정한 객관적이되 무의미한 숫자들이 작업치료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는 주관적이되 유의미한 느낌보다 가치 있게 여겨지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하고 답답했다.
가장 싫었던 건 내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병원에서 일하고 벌어들이는 돈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도 그 근본 없는 숫자들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난 병원에서 일하는 내가 싫었다.
전동스쿠터를 타는 P씨와 작업치료를 끝내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P씨가 길을 가다 말고 갑자기 멈추더니 윗옷 주머니를 헤집어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낸다. 나도 발길을 멈추고 담배를 한 개비 얻어 함께 불을 붙인다. 자욱한 담배 연기는 점점 흐려지고 이내 보이지 않을 만큼 흩어진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며 작아지는 회색 먼지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삶처럼 느껴진다.
경과가 굉장히 좋은 일부 환자들의 이야기가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돌곤 했다. 그러나 그 한 줄기 빛에 이끌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랜 시간을 터널 안에서 헤매다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도 갑자기 죽곤 했다. 치료받다가 돈이 없어서 퇴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나 중장년 여성분들 중에는 하루에 24시간씩 한 달을 일하고도 내 월급과 비슷한 돈을 받는다는 분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나 남성의 경우엔 같은 일을 해도 그보단 사정이 좀 나았다.
이 모든 상황이 슬프다기보단 이상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상념에 빠져 있기에 난 너무 바빴다. 병원은 언제나 바쁜 곳이었다. 바빠서 감정을 처리할 여유조차 없으면 화가 났다. 처음엔 팀장이나 실장, 교수, 센터장, 원장처럼 ‘높은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그런데 그들도 가슴 속에 나와 비슷한 억울함을 품고 있는 듯했다. 우린 왜 서로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있는 걸까. 병원에는 건강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느끼던 분노와 억울함을 다시 떠올린다. 그런 해묵은 감정들보다야 차라리 P씨와 나눠 피우는 담배 연기가 건강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담배는 몸에 안 좋지만,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잔소리가 P씨의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될까? 쉬이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다.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치료행위 대부분은 미래지향적이다. 언젠간 잘 걷기 위해, 언젠간 팔을 잘 쓰기 위해, 언젠간 잘 삼키기 위해, 언젠간 잘 기억하기 위해…. ‘환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올지 안 올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고되고 지루한 훈련을 반복한다. 그들에게 오늘은 미래를 향한 발판이다.
그런데 내일의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에 비해서 오늘 하루의 가치가 너무 큰 건 아닌가? 신체의 완전한 치유를 바라며 몇 년 동안 몇 곳이나 병원을 전전하는 사람들에게 부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일의 기적을 꿈꾸며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는 수많은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이가 기적 대신 좌절을 맛보고 있는지. 희망이란 불씨에 입바람을 불며 병원이 얼마나 많은 부당 이득을 챙기고 있는지.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오늘을 함께하는 작업치료사가 되고 싶었다. 나중에 몸이 나아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고, 곧바로 그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원하는 작업의 난이도에 따라 때로 어떤 것은 포기하자고, 어떤 것은 함께 대안을 찾아보자고, 어떤 것은 나중에 도전하자고, 어떤 것은 당장 도전하자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하는 작업치료사가 되고 싶었다. 의사의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하수인이 아니라 직접 생각하고 판단하고 소통하고 책임지는 작업치료사가 되고 싶었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에선 간호사, 사회복지사, 의사, 작업치료사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는다. 의견 차이가 있다면 서로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곳에서 우린 모두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잘못한 부분을 고치며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우린 빈틈없는 전문가보다는 건강한 삶을 향한 동반자에 가깝다.
인간은 작업(=의미 있는 활동)하는 존재다. 꼭 훈련이나 운동이 아니더라도 즐거운 작업에 참여하며 지금 주어진 하루하루의 찬란함을 만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치료적이다. 그래서 난 병원이 아니라 당신의 집으로 출근해야만 한다. 병원이라는 환경은 좀처럼 즐거운 작업을 함께하기 어려운 공간이니까.
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 일하던 시절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사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방문작업치료를 하는 오늘의 나는 퍽 행복하다. 내가 하는 작업치료를 누구나 최고 최선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지금 내가 하는 활동이 의미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작업치료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함께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식당도 가고 동네 산책도 하면서, 언제나 마음 한편에 아련한 꿈처럼 품고만 있었던 방식의 작업치료를 지금 실제로 해보고 있으니까. 이제야 진짜 작업치료사가 된 것 같은 기쁨에 벅차다.
바라건대 병원 밖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치료가 지금보다 많아지기를. 머지않아 이런 방식의 작업치료가 병원 작업치료의 현실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언젠간 병원 밖에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 인문교양 매거진 월간 '유레카'에 두 달에 한 편씩 총 8개월동안 네 편의 방문작업치료 에세이를 썼습니다. 재활치료 분야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업치료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병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방문 치료에 대한 낯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재활이라고 하면 흔히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적 치료만 떠올리게 되는 한국 사회에서 제 글이 새로운 길을 향한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95호(2025년 2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해 올립니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https://www.eureka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