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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치료 에세이 <제3화>

전동스쿠터와 함께한 남산 여행기

by 석류

치료를 해보기 전까지는 치료사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세상에는 어떤 조건에 처해보기 전까진 할 수 없는 경험이 존재하므로. 우리가 함께 남산을 오르던 날도 그랬다. 그날 우리는 아주 당혹스럽고 뜻깊은 경험을 함께했다.



남산만 한 전동스쿠터


많은 사람이 ‘전동휠체어*나 전동스쿠터나 비슷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겠지만 둘은 생김새부터 다르다. 한 개의 조이스틱만으로 운전할 수 있는 전동휠체어와 달리 전동스쿠터는 실제 스쿠터처럼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운전해야 하기에 핸들의 크기만큼 차체의 길이가 길고 그로 인해 회전 반경도 훨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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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전동휠체어 / 우 : 전동스쿠터


그래도 P씨의 전동스쿠터가 처음부터 그렇게 커 보였던 건 아니다. 그건 치료사인 나뿐만이 아니라 P씨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음식점, 지하철, 저상버스, 화장실, 엘리베이터, 사람 많은 건물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전동스쿠터의 크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선 사람의 몸에만 맞추어 설계된 모든 공간에서 전동스쿠터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 신세로 전락하곤 했다.


그런 상황은 절대 P씨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P씨는 미안함과 수치심을 표현했다. 지하철과 저상버스에 마련된 ‘휠체어 이용자 우선 공간’에서도 ‘이동 약자 우선 탑승’이라고 적혀 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도 P씨는 좀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동스쿠터를 위해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전동스쿠터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비장애인들은 그런 상황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나서서 전동스쿠터가 들어가야 하니 자리를 좀 비켜달라고 부탁하기 전까지 그들은 이야기하고, 웃고, 모바일 화면을 보면서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요지부동 가만히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엄청난 악인이라서 그렇게 행동한 걸까? 평소 내 모습은 저것과 달랐나? 확신할 수 없었다.


‘일어서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 그곳에서 비장애인들은 주변을 살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더 그랬을까. 전동스쿠터의 시동을 끈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는 P씨의 모습이 사뭇 이질적으로 보였다. 난 부러 P씨에게 가까이 다가가 별 볼 일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으로 이 터무니없는 이질감이 조금이라도 흐려지길 바라며….



일상에서 작업치료를


함께 전동스쿠터를 타고 여기저기 다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P씨는 반색했다. 이동이 서툰 자기 모습이 눈치가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전동스쿠터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고. 하지만 작업치료사와 함께라면 외출에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예전처럼 다시 산에도 오르고 낚싯대를 던져놓고 강가에도 앉아 있고 싶다고 말했다. 우린 일단 P씨의 집에서 가깝고 교통편도 좋고 전망도 좋은 남산에 올라 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려면 우선 일반 도로, 폭이 좁은 길, 비포장도로 등 다양한 도로를 전동스쿠터로 다녀봐야 했고 건널목과 공중화장실, 저상버스, 지하철 등 다양한 시설물도 전동스쿠터를 탄 채 이용해 보아야 했다. P씨와 만나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이 전부였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며 익숙해지는 데 약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긴 시간…. 4개월은 긴 시간인가? 병원에서 일할 때 3개월 동안 매일 똑같은 치료를 받고 아무런 변화 없이 퇴원하는 사람을 수없이 봤다. 내가 만약 P씨를 병원에서 매일 만났다면? 그럼 우린 4개월 동안 앞서 나열한 과제들 중에서 몇 가지나 시도할 수 있었을까? 하얗고 안전하고 깨끗한, 깨끗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병원이란 공간에서….


‘진짜 작업치료는 병원 밖에 있다.’


별것 아닌 듯한 소소한 일상의 작업에 실제로 참여하고 그 과정이 차차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는 것, 개인에게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곧 치료의 수단이자 목적이 되는 것. 병원 밖 지역사회에서 P씨와 함께 보낸 4개월은 내가 그간 꿈꿔온 이상적인 작업치료를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P씨는 그 시간을 ‘마음의 치료’라고 부르며 즐거워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나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P씨는 '진짜 작업치료'를 하고 싶다는 내 꿈을 실현해 주었다. 내가 P씨를 치료하는 동시에 P씨도 나를 치료하고 있었다. 우리의 해방은 연결되어 있었다.



장애가 아니라 세상과 싸우는, 나쁜 작업치료사


드디어 남산에 오르는 날.


‘남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각종 도로와 시설물에 충분히 익숙해진 우리는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가 남산 순환 저상버스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주말이라 버스에 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 도저히 전동스쿠터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버스 한 대를 그냥 보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우리의 옆으로 비장애인 승객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왜 저들은 우리 뒤가 아니라 우리 옆에 서지? 저들은 우리를 승객으로 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줄을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그래도 버스 기사는 우릴 발견하고 지원하겠지?’


그러나 잠시 뒤 도착한 버스 기사는 뒷문을 열어 경사로를 내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비장애인 승객들만 태우고 있었다. 우리가 안 보이나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가 있던 자리는 절대 그럴 위치가 아니었는데…. 당황할 여유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영영 버스를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다급히 버스 기사에게 다가가 전동스쿠터 이용자가 타야 하니 경사로를 내리고, 전동스쿠터가 탑승할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제야 버스 기사는 귀찮다는 듯이 운전석을 빠져나와 우리를 손님으로서 맞이할 준비를 했다.


경사로를 내리는 와중에도 비장애인 승객들은 계속해서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랐고 버스 내부는 점점 혼잡해졌다. 비장애인 승객들의 탑승을 막고 전동스쿠터 이용자부터 태우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의 무관심한 표정에 말문이 막혀 우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좁은 공간에서 전동스쿠터를 움직이느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P씨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나도 비슷한 표정이었으리라. P씨에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운전을 잘 못하네.” 면박을 주는 버스 기사의 말이 아니꼬웠다.


‘운전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해 놓고 웬 악담이람? 자기는 뭐, 교통체증 뚫고 버스 운전하나? 애초에 사람을 적당히 태웠어야지….’


버스의 종점이자 회차 지점. 비장애인 승객들이 일제히 버스에서 내렸다. 이젠 우리가 내릴 차례. 그런데 전동스쿠터 하차를 위한 경사로가 채 내려오기도 전에 앞문으로 새로운 승객들이 탑승을 시작했고, 버스 기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러다 버스가 가득 차면 우린 어떻게 내리지?’


“저희부터 내려주고 태우세요!” 분노가 치밀어 버스 기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P씨가 이런 상황을 작업치료 시간에 경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언젠가 P씨도 무례한 사람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염치없고 고마운 줄도 모르는 나쁜 장애인이라며 P씨에게 돌을 던질 때, 난 P씨 옆에 앉아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나쁜 작업치료사로 기억되고 싶다.



안전한 삶을 넘어 의미 있는 삶으로


남산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하늘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서울이라고 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쨍한 하늘, 기후위기고 대기오염이고 우리가 외치던 것이 모두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파란 공기를 폐에 가득 담고서 걸으며 구르며 하산하는 길, 한양도성 성곽길을 지나며 조금씩 짙어지던 매연 냄새가 국립극장에 다다르자 코를 찌르며 이곳이 서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 주었다.


장충단공원을 지나던 P씨가 전동스쿠터의 핸들을 갑자기 틀었다. 대로변 말고 공원을 따라 이동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너무 위험한 길을 골랐다. P씨가 들어선 비포장, 급경사의 좁은 골목길은 자그마한 전동스쿠터 바퀴로 지나기엔 너무 험했다. 전동스쿠터가 균형을 잃고 덜컹거리며 P씨의 몸이 들썩였다. 난 재빨리 손을 뻗어 전동스쿠터를 붙잡았고 P씨는 다행히 균형을 찾았다. 병원에선 겪지 않아도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위험했지만 자유로웠던 순간이 지나고 P씨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언제든 위험이 엄습할 수 있는 것, 평범하게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놀랄 수 있는 것, 그러다 안심하고 웃게 되는 것, 가끔은 다치기도 하는 것…. 이런 게 우리 삶이다. 그래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작업치료의 핵심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치료사도 모든 위기를 제거할 수는 없으니까.


안전은 기본일 뿐, 건강한 삶에는 안전을 넘어 의미가 필요하다. 안전을 핑계로 장애인을 시설에, 병원에, 집에 가두는 대신 지역사회를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의미 있는 지역사회 활동에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유니폼을 입고 병원에서 일할 때 고객**들은 치료사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랐다. 그러나 일상복을 입고 병원 밖에서 일하는 지금, 내가 고객들에게 의견을 제시하면 고객들도 의견을 낸다. 어디로 향할지, 어느 길로 갈지 함께 결정하고, 심지어 때로는 P씨처럼 갑자기 핸들을 꺾기도 한다.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거나, 시키고 따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통하고 협상하는 상호적 관계로 만난다. 같은 옷을 입고 만난다는 것은 지역사회 기반 치료의 큰 장점이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이런 방식의 작업치료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난 평상시엔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다가 일주일에 단 2시간만 작업치료사로 일한다. 아무리 꾸준히 교육을 듣는대도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 다른 작업치료사들만큼 내 전문성이 뛰어날 리 만무하다. 이런 글을 쓰기에도 한참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언젠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작업치료사가 내 자리를 빼앗고 나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지역사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몇 가지 이야기를 만드는 일, 난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 양손을 어느 정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동휠체어를 처방받을 수 없는데, 가장 저렴한 전동휠체어도 가격이 250만 원에 육박한다. 질병으로 인해 막대한 병원비를 지출하고 변변한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는 많은 장애인에게, 처방 없이 전동휠체어를 구매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 보통 환자(患者, patient)라는 표현은 아프거나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프지 않고 질병도 없는 사람도 치료나 진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요즘은 치료나 진료 대상자를 지칭할 때 환자라는 말 대신 고객(Client, 클라이언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93호(2024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해 올립니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https://www.eureka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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