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치료', 결함과 능력이 아닌 삶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커다란 무지개 현수막이 걸려 있는 마포의 어느 술집이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밝고 활기차고 반짝이는 선배 여성 활동가였다. 작업치료사로 일하다가 장애인권 활동가로 일하다가 지금은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고 있다는 내 소개를 듣자마자, 그는 치켜들었던 맥주잔을 테이블에 ‘탁’하고 내려놓더니 내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다소 거칠고 꽤 따뜻한 손이었다.
“작업치료사라고요? 저는 마포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무지개의원에서 일하는데,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요? 지역에 재활이 필요한 사람이 정말 많아서, 함께 일할 치료사를 찾고 있었거든요.”
우린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난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병원에서 작업치료사로 일하는 걸 그만두고 돈벌이도 안 되고 복지도 형편없고 고용도 불안정한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은 장애인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는데, 지역사회에 뿌리를 두고 작업치료사로 일할 수 있다니! 꿈같은 제안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우린 함께 설거지를 시작했다. 내가 비누로 기름을 닦으면 그는 흐르는 물에 거품을 헹구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렇게 다소 어이없이 시작된 우리의 연대. 병원이 싫어서 도망쳤던 나는, 이제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작업치료사가 되었다.
방문작업치료사로 처음 일을 시작한 날, 제시어는커녕 주제조차 정해지지 않은 백일장에 단독으로 참가해 거대한 백지를 받아 든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일만 하던 내 손안에 갑자기 ‘뚝’하고 떨어진 무한한 자유는 내게 무질서, 즉 혼돈만을 의미했으니까. 눈앞이 새하얘졌지만, 당장 작업치료를 기다리는 작업치료 의뢰자 앞에서 멍하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난 내게 가장 익숙한 방식의 작업치료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하던 작업치료를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업치료 대상자의 신체 기능을 수치화하기 위해 평가를 실행하고, 신체 기능을 증진하기 위해 치료를 실행한 뒤, 재평가를 통해 대상자의 신체 기능이 얼마나 증진되었는지 수치화하는 일…. 그렇게 작업치료 대상자의 신체 기능이 ‘몇 점’ 혹은 ‘몇 단계’ 증진되었는지 밝힘으로써 치료 효과를 증명하는 일…. 그 결과에 공신력을 부여하기 위해 ‘작업치료사 OOO’라는 서명을 다는 일….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매일 반복하던 일을 지역사회 작업치료사가 되어서까지 자발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니! 우리의 신체는 어떤 ‘보편적인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권리로 ‘보편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신체에 낮은 점수를 매긴단 말인가? 손상된 몸을 ‘정상 신체’에 맞추는 것이 작업치료는 아니라며 병원을 나온 내가, 지역사회에서 만난 장애인들의 몸을 ‘고치는 척’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니!
난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도 이미 굳은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손상된 기억력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오그라든 오른팔과 손가락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적어도 손상된 몸을 ‘고치는 척’하는 것보다는 손상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을 찾고, 그 작업을 스스로 해내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연습하는 것이 훨씬 좋은 작업치료 아닐까?
나는 노래 실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래 실력은 충분히 뛰어나지만, 수학 점수가 낮으니 수학 공부를 더 하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꽉 막힌 작업치료사가 되고 싶진 않았다.
의사이자 신경학자였던 올리버 색스는 그의 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자신이 담당했던 환자 ‘리베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지난번에 진찰했을 때의 그녀는 절망적이었다. 그때 한 테스트는 모든 신경학과 심리학의 테스트가 그렇듯이 결함을 밝혀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녀를 분해해서 결함과 능력의 양 측면으로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 그러나 그러한 검사를 통해서는 결함 외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결함 저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나는 우리가 그녀에게 접근한 방법이나 평가가 아주 터무니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방법이나 평가는 결함을 발견할 수 있을 뿐, 결코 능력을 찾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우리는 소위 ‘결함 연구’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서 ‘내러톨로지’(서사학) 쪽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러톨로지’야말로 지금까지 무시되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구체성의 과학’인 것이다.
올리버 색스가 작업치료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난 이 글에 담긴 그의 통찰을 좋아한다. 인간의 신체를 결함과 능력의 두 측면으로 분해하는 평가로는 인간의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다음 리베카의 말처럼.
“의미 있는 것이 필요해요. 수업을 받거나 워크숍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 연극이에요.”
그동안 일했던 병원을 대규모 군대에 비유한다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작업치료사 1명씩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그야말로 농기와 문짝을 들고 겁도 없이 봉기한 민병대나 다름없었다. 선배도 있고 동료도 많았던 병원에서와 달리, 우리 방문 재활 팀에 작업치료사는 나밖에 없었다. 작업치료실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작업치료 평가와 중재를 위해 병원에서 사용하던 각종 도구도 없었다. 흡사 동료도,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야생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난 아예 새로운 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작업치료 평가 방법부터 중재 방법, 기록지 작성 방법에 이르기까지 병원에서 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새로운 길을 탐험하다 보면 막다른 길이나 낭떠러지를 마주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오래된 길도 최초엔 새로운 길로 시작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 방식을 비판하겠지. 그렇다면 그에 의해 내 길이 묻히고 새 길이 날 거다. 내 시도가 더 나은 방문작업치료의 초석이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날 밟고 넘어서리라는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깨끗이 소독되고 안전한 병원 작업치료실 vs 변화무쌍하고 위험천만한 지역사회. 난 지역사회의 예측 불가능성과 위험성 대신 가능성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예를 들어 지하철이나 버스는 병원엔 없고 지역사회엔 있다. 그러니 작업치료 대상자와 함께 전동스쿠터로 대중교통 타는 연습을 해야 한다면, 그건 병원 말고 지역사회 환경에서만 할 수 있는 작업치료다. 이렇듯 지역사회 작업치료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생각해 보니 작업치료 평가도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작업치료는 변형된 신체를 ‘정상 신체’로 탈바꿈하거나 장애로 인해 손상된 신체적 기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따라서 난 작업치료 전후로 치료 대상자의 신체 기능이 ‘몇 점’ 또는 ‘몇 단계’ 증진했는지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하는 일 대신 내가 ‘관찰’한 내용과 치료 대상자의 ‘경험’을 최대한 자세히 기록하는 일에 집중했고, 그것이 곧 작업치료 평가였다.
이를테면 전동스쿠터로 버스를 타본 적 없던 사람이 버스를 탈 수 있게 되는 것, 혼자서만 운동 겸 산책을 즐기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나들이를 즐기게 되는 것. 그러한 작업의 변화를 점수로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 변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의 능력 변화는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구체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가는 작업치료사, 난 그런 치료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