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이후 성장하는 스타트업들은 자연스럽게 대기업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러한 관심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투자자를 통해 특정 스타트업과의 미팅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당 기업의 내부 지표나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정보들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의 창업생태계가 성숙해지면서 과거에는 협업이나 전략적 파트너십의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스타트업들이 이제는 대기업의 주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투자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대기업과의 협업이나 제휴는 양날의 검과 같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대기업과의 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자원의 소비가 스타트업의 핵심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보통 실제 수익을 창출하는 핵심 사업부가 아닌, 신사업 부서나 혁신 관련 부서를 통해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추진한다. 반면 스타트업은 기업의 모든 역량과 자원을 핵심 사업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기업은 제한된 자원만을 투입하여 새로운 협업을 제안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양측의 사업 추진에 대한 절박함과 몰입도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스타트업-대기업 협업은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진행 속도가 더뎌진다. 이 과정에서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종속되어 본연의 성장 방향성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기업의 기술 및 사업모델 탈취 위험이 여전히 현존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 한국의 기업문화가 성숙하지 않았던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최근에도 투자 검토를 명목으로 스타트업의 사업모델을 참고하여 유사 사업을 런칭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비록 많은 기술이 공개되어 있고 대기업들도 풍부한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스타트업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장 통찰력이나 특화된 기술들은 여전히 매력적인 경쟁 우위 요소이다. 이러한 핵심 역량이 대기업과의 제휴나 투자 검토 과정에서 노출되어 탈취당하는 상황은 스타트업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리스크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이 대기업과의 관계를 전면 차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대기업은 단순한 PoC(Proof of Concept) 협력만으로도 인지도가 부족한 스타트업에게 강력한 레퍼런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매출을 보장하는 핵심 고객사나 잠재적 M&A 파트너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이다. 관건은 협력의 적절한 시기와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창업자는 대기업과의 관계는 전략적으로 유지하되, 과도한 종속성을 경계하고 항상 다양한 대안을 확보하며 독자적인 성장 경로를 구축해야 한다. 스타트업이 자체적인 성장 동력을 입증할수록 대기업의 진정성 있는 관심도 높아질 것이며, 이는 결국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진정한 Win-Win 파트너십으로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