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
거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렇게 화장을 했는데도 들뜨네. 아직 붉은 기도 보이고 건조해서 푸석하고.’
하늘은 애매하게 흐린 상태였다. 날씨에선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설마 오진 않겠지. 하지만 독립 서점 근처에 다다를 무렵,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봄이라기엔 쌀쌀한 바람. 옷깃을 여며도 파고드는 추위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물냄새와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그렇게 봄을 알렸다.
‘이따 그치기만 바라야겠다. 아니면 이 정도라면 그냥 맞고 가지 뭐.’
귀퉁이를 돌아서자 작은 서점 ‘따듯한 쉼표’가 보였다. 가장 어려워하던 게 느린 2악장이었는데. 쉴 줄을 모르던 내가 이런 걸 들을 줄이야. 이전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딸랑— 조용한 클래식 음악, 교차하는 낯선 시선들. 반갑게 맞이해 주는 서점의 대표님. 이름을 적고 빈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은은한 커피향기, 책장을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들. 어색함 속 느껴지는 고요함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마스크를 쓴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피해버렸다. 살짝은 창백해 보이는 안색,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는 눈빛. 가까이 닿은 것도 아닌데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감각이 드는 걸까.
느낌을 되짚어볼 시간도 없이 수업은 시작됐다.
“자, 첫 시간인데 서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해 볼게요.”
내 왼쪽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차례가 될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는 수백 명의 시선도 견뎌내면서 자기소개는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이지?'
몇 사람이 지나고 아까 눈을 마주쳤던 남자의 차례가 되었다.
“제 이름은 정하늘입니다. 첫 번째는, 사진이에요.
학생 때부터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해서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남기는 것을 좋아해요.
두 번째는 흙을 좋아합니다. 가끔 맨발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취미로 도예도 하고 있습니다. 흙과 닿으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마지막으로는 행복입니다. 가지고 있을 땐 모르던
작은 행복들이 있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진, 흙, 행복이라. 나와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먼저 스쳤다.
낮은 저음이 공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문장 끝에서 살짝 힘이 빠졌다. 마침표 대신 쉼표를 남기는 사람.
그가 말을 마치자, 단정한 단발을 한 여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10년 넘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백수라고 했다.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일을 그만둘 때도, 아무것도 안 할 때도 백수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같은 단어인데, 그녀가 말하니 이상하게 멋있어 보였다. 곧은 자세와 흔들림 없는 목소리. 일이 힘들어서 더 힘든 일로 잊고자 축구 동아리에 들었다고 했다. 공을 무서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골키퍼를 맡고 있다고.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내 안에서는 다른 단어들이 맴돌았다.
사진, 흙, 행복.
어느덧 내 차례였다. 목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천천히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저는… 첫 번째로 음악이에요. 할아버지부터 저까지 음악을 하는 집에서 자랐고
그냥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 있더라고요.
두 번째로는, 음… 공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겪는 것처럼 고통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잔인한 영화도 못 보고…
세 번째로는 힐링입니다. 요즘 어떤 게 마음을 힐링할 수 있을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대표님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수업을 이어갔다.
“다음으로는 일상을 적어 보려고 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제 하루 있었던 일을 그냥 적어 보세요. 일기처럼요.”
곧 클래식 음악에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일상이라. 내 일상을 그냥 적기는 힘들 것 같은데… 보여줄 수 있는 일상이 뭐가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 모카와의 시간을 적었다.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마주치고 자기 전까지 함께하는 소소한 시간 말이다.
사람들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 엄마와 쇼핑하는 이야기, 주말에 친구와 만난 이야기들을 했다. 그중에는 작은 행복들도 보였다. 왠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났다. 나도 언젠간 다시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하늘이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일 년 동안 아팠어요.
병명이 뭔지도 모르고 찾아다녔죠.
그렇게 일상을 잃다가…”
그는 잠시 숨을 삼켰다.
“지금은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곁에 있어 준 사람들이 고마운지 느끼고 있습니다.
저를 기다려 준 스텝들과 어제 일을 마치고
같이 삼겹살을 먹었어요. 정말 맛있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미 고통을 건너온 사람의 온도가 느껴졌다. 나는 아직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고, 그는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금세 시간이 지나고 수업은 마무리를 향해갔다. 대표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이번 과제는요 ‘내 삶의 중요한 순간 하나’를
골라 적어 오는 겁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장면이어도 괜찮고요.
그 순간이 나를 어떻게 바꿨는지,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만 진심으로 적어주시면 돼요.”
나는 수첩 귀퉁이에 과제를 적었다. 문득 올라오는 기억을 다시 눌러 넣었다.
‘여기선 안 돼.’
그때 고개를 들자, 물을 마시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그 사람이 눈을 피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걸까.
고요한 눈동자, 가을과 겨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듯한 쓸쓸함. 나는 한 박자 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서자 가느다란 비는 그새 멎어 있었다. 젖은 보도블록 위로 주황빛 가로등이 번졌다. 집에 도착하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울음.
"모카야, 다녀왔어."
잠시 앉아 모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털 사이로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일기장을 펼쳤다. 가끔 하루를 적어내는 일. 오늘은 쉽게 펜을 내려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카야, 오늘 뭔가 이상했어. 그냥… 뭐 때문인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건 글로 적어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