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새벽 4시가 되도록 잠들지 못했다. 낮에 봤던 그 사람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내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가까이 가지 마. 위험해.’
그 말을 거부하듯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적었다. 정하늘. 서른둘, 나보다 세 살이 어린 사람이구나. SNS도 하지 않던 내가, 검색까지 하고 사진들을 훑다니.
그는 작가라기보다 모델에 가까워 보였다. 큰 키, 수트가 잘 어울리는 체구, 깊은 눈매. 조명 아래 선 사람들의 찰나를 붙잡고 있었다. 화려한 색감, 닿을 수 없는 세계. 그런데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나와 비슷한 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왜일까.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연예인도, 모델들도 많을 텐데. 나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을 텐데.
아니야, 그게 뭐가 중요해. 예술하는 남자잖아. 평생 봐온 그들은 고집스러웠고 자기밖에 몰랐다. 할아버지부터 아빠까지, 현실과는 동떨어져 살며 고집을 부리던 그들. 그 고집을 맞춰주던 할머니와 엄마.
벌써 새벽 네 시 반이다. 눈을 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듯 되뇌었다. 불을 끄자 눈앞에 사진들의 잔상이 떠올랐다. 아까 봤던 모델과 연예인들, 그리고 그들을 찍고 있던 작가.
그 사람이 다정한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침의 햇살이 퍼지는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다. 오래전부터 함께한 사람처럼.
금방 잠든 것 같은데, 알람이 울렸다. 그의 조용한 말투가 귓가를 여전히 맴돌았다. 어제 본 사진 때문일 거라고,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모카가 팔 옆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등을 쓰다듬었다. 털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체온이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씻고, 대충 얼굴을 정리했다. 오늘도 엄마 가게를 봐야 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손님도 없는 가게를 지키는 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가게는 작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건강식품과 찜질기, 각종 영양제가 진열된 조용한 공간. 아침이면 엄마는 일찍 가게 문을 열어두고 작은 메모를 남겨뒀다.
「점심은 냉장고에 있어. 영양제 챙겨 먹고.」
메모를 떼어 주머니에 넣고,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트로트, 찜질방에서 풍기는 편백 나무 냄새. 창밖으로는 색색의 봄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고개를 내리자 보이는 보풀이 일어난 회색 니트. 음악이 없는 시간 속에서, 색을 잃어버린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의 대화 소리, 캐리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라디오에서 대학교 입시 때 연주했던 곡이 흘러나왔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음이 닿는 순간, 내 안에 깊이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반응했다.
열여덟 어려운 형편에, 현실적으로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알아봤다. 기적처럼 찾아온 할머니의 도움 속에서 열정과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던 날들. 열아홉의 마지막 겨울은 오로지 연습실의 기억뿐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미친 사람처럼 연습하고 공부했다. 20대는 독기만 있으면 체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삶의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참고 버텼던 시간은 결국, 불어난 빚더미처럼 대가를 요구했다.
그 모든 장면이 아주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고, 복잡한 생각들을 애써 외면했다. 그때, 가게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울렸다. 퍼뜩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향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바람결이 스쳐 간 것이었다. 일어난 김에 진열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문 쪽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오후가 되어 눈꺼풀이 내려앉은 참이었다. 딸랑— 체구가 작고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서 계셨다.
“여기 찜질도 하나요?”
“네. 1회 체험 무료라, 시간 되시면 하고 가세요.”
“고마우이. 내 요 앞 아파트 살아. 여기랑 가깝네.”
느릿하게 찜질복을 갈아입고 나온 할머니에게 따뜻한 차를 드렸다.
“신장에 좋은 차예요.”
“구수허이… 좋구먼.”
단골들이 와도 바쁜 척을 하면서, 혼자서 찜질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할머니와 함께 찜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색하지 않는 외로움이 느껴져서일까.
할머니는 뼈 빠지게 일하며 아이들 키운 이야기, 무너진 건강, 아픈 손녀 얘기까지 조곤조곤 풀어놓았다.
“갸가 어려서부터 영특했는디, 수석 연구원? 머시기 하다 다 내려놓고…
결국엔 시골로 요양 내려갔어. 다 소용없어. 아프면.
그니까 젊을 때 하고 싶은 걸 해야 해. 마음 속이고 병나지 말고.”
찜질을 마친 할머니는 조용히 떠났다. 나는 땀을 닦으며 빈 찻잔을 바라보았다. 혼자 머물던 공간에 오랜만에 따뜻한 대화의 온기가 남았다.
‘다 소용없어. 아프면.’
사람은 늘, 잃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되는 걸까. 이제 더는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