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지 않은 사람

파동

by 설안



두 번째 모임을 가는 길이었다. 한 달 전엔 마치 모든 나무가 죽어버린 것처럼 보였는데, 오늘은 몇몇 나무 사이로 연두색 새싹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잠시 서서 바람과 흙냄새와 물기 어린 공기를 깊이 들여 마셨다. 낙엽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 흙 아래로 물이 스며드는 듯한 소리.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생명의 기척이 조용히 마음을 두드렸다.


내려오는 길, 발밑에 버려진 사탕 봉지를 집었다. 그 아래 숨듯 자라던 아주 작은 새싹이 함께 딸려 나왔다. 순간 아차 싶었다. 괜히 좋은 일을 하려다 생명을 죽인 건 아닐까. 앉아 조심스레 흙을 파고 그 새싹을 다시 눕혔다. 생명력이 있다면 이곳에서 자라나겠지. 그 작고 연둣빛인 존재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천천히 다시 자라날 수 있을까.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대표님은 여전히 같은 미소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말투가 어쩐지 마음을 놓이게 했다. 모임원들은 각자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꼭 쥐고 있었고, 누군가는 시작 전까지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느덧 수업이 시작되었다. 대표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다들 과제 잘해 오셨나요?”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마주치자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는 하긴 했는데, 못 가지고 왔어요.”

“괜찮아요. 아. 저희 단체 대화창을 만들어서

올리면 좋을 것 같아요.

수업이 끝나면 초대 링크를 보내 드릴게요.

먼저, 오늘 과제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짧게 이야기해 주세요.”


다들 대표님의 눈을 피했다. 그러다 대표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수아님부터 얘기해 볼까요?”

“저는…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2년 전,

법적으로 좀 복잡하고 힘든 일을 겪었고,

몸도 많이 망가졌어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밀어붙이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비로소 멈췄어요.

그 이후로는 하루하루를 그저 견디는 데

집중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음악도 못 하고, 무대에도 설 수 없는 나는…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삶을 그릴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이 수업에 오게 됐어요.”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렸다. 괜히 분위기를 가라앉힌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대표님의 눈빛이 조용히 나를 감쌌다. 그 순간, 코끝이 살짝 찡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진심을 들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리고 용기 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응원할게요.

수아님에게 이 시간이 좋은 자양분이 되기를 바라요.”

대표님의 시선이 옆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자, 그럼… 다음은 눈 마주친 희연님!”

“앗… 네. 10년 전부터 여자 축구 동아리에서

주말마다 축구를 하고 있어요.

그 시작을 떠올려봤습니다.

그땐 꿈보다는 현실을 택했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며

감정을 많이 눌렀어요.

어느 순간 공황이 찾아왔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지금은 사표 내고 나왔어요. 적금까지 깨고,

하고 싶은 걸 해보려고요.

요즘은 그냥… 실컷 놀고 있습니다. 백수예요.”

“오… 멋있네요. 희연 님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마음껏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그녀는 말이 끝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담담한 표정 속에 오래 쌓인 인내가 고여 있었다. 조용히 말을 이어가면서도 어딘가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희연은 첫날에도 눈에 들어왔었다.

“다음은, 지혁 님이 해주시겠어요?”

대표님의 말에, 처음 보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아, 바빠서 과제는 못 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이야기를 쓸지는 고민해 봤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제조업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어릴 땐 그 회사를 제가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크면서

하고 싶은 게 생겼고, 다른 과로 진학했죠.

집에서는 반대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해봤어요. 그런데 올해 아버지가 갑자기

입원하시면서,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정리할 것도, 생각할 것도 많고… 뭔가 복잡해서요.

글을 쓰면, 조금 정리가 될까 싶어서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한 말투와 차분한 눈빛, 생각을 눌러가며 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가업과 삶 사이, 가족의 기대와 자기의 꿈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 얼굴. 그건 어쩌면…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얼굴이었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모두의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 정하늘, 그 사람. 끝나는 시간까지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기다렸던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수업은 느리게 흘렀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휴대폰 화면을 한 번 켰다가 다시 껐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밤늦게 나는 또 그의 SNS를 열었다. 처음 봤던 사진들, 그날 이후 새로 올라온 게시물들. 그냥…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아래로 내리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아… 여행을 갔구나.

스크롤을 내리다 실수로 손가락이 눌렸다.

‘좋아요’가 반짝 켜졌다.

순간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진짜… 나 지금, 누른 거야? 재빨리 다시 눌러 표시가 사라진 걸 확인했다. 설마 알람이 간 건 아니겠지?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무슨 짓이야, 진짜…”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카가 조용히 다가와 내 옆에 몸을 말았다. 숨소리만 가득한 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사진 속 풍경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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