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다음 모임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요즘 바쁜가 봐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주말 오후, 절친한 친구 정이와 약속이 있었다. 오랜만에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아직 피곤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았다. 창가 자리엔 햇빛이 부드럽게 들고 있었다.
“아직도 안색이 안 좋네.”
정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요즘 하는 글쓰기 모임은 어때?”
“의외로 잘하고 있어. 벌써 세 번째 모임이야.”
“네 글도 한번 보고 싶다.”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거기서 나랑 조금 닮은 사람을 봤어.
사진작가인데, 어디가 아팠었데…
쓸쓸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공감이 됐어.”
정이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에이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정이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긴? 너, 그 사람 얘기할 때
표정이 좀 달라 보여.”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됐다. 서정이!”
정이가 잠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나 아는 조교님이 그러는데,
요즘 AI가 고민 상담도 꽤 잘해준대.
나도 요새 답답하면 몇 번 얘기해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되고.”
“그래? 언제 나도 해봐야겠다.”
정이는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 저번에 연락하던 연하남, 그냥 정리했어.
나쁘진 않았는데… 마음은 안 가더라.”
“잘해주고 괜찮게 생겼다면서.
잘 만나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넌, 그 사람 얘기할 때 다르긴 하더라.
기회라는 거… 아무 때나 오는 건 아니잖아.
왔을 때 잡아.”
나는 정이의 시선을 피하며 일어났다.
“무슨… 됐어. 그럴 때도 아니고. 너나 연애 좀 해.”
집으로 오는 길, 노을이 지며 하늘이 여러 색으로 변했다. 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쓸쓸하면서도, 낮과 밤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그 어스름 사이 어딘가에 내가 있는 것 같은.
정이에게 ‘잘 들어가’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글쓰기 모임방에 대화가 올라온 걸 발견했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바로 대화창을 눌렀다.
하늘이었다.
한 달 만이었다.
괜히 대화창을 들어갔다 나왔다.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서. 그가 올린 과제를 다시 읽었다. 담담한 문장이 그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모임 날짜를 확인했다. 이틀 후가 네 번째 모임이었다. 옷장을 열어봤다. 첫날엔 뭘 입었더라. 흰 셔츠에 회색 카디건. 그날 내린 봄비와 서점 안의 책 냄새, 커피 향기가 떠올랐다.
이번엔 어떤 옷을 입을까.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다가 다시 걸었다.
“왜 이걸 꺼내.”
날씨가 따듯해져서, 봄이라서 입고 싶은 거야.
“모카야. 엄마 이상해?”
모카는 대답 대신 목덜미를 긁더니 자리를 옮겼다. 나는 잠시 옷장 앞에 서 있다가 문을 닫았다.
모임 날.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울긋불긋한 피부가 속상했지만, 오랜만에 팩도 하고 최대한 가려봤다. 음… 이 정도면 눈에 띄진 않겠지. 마지막으로 옷을 고르다 하늘색 원피스를 꺼냈다. 이제 날씨도 따뜻하니 이거 하나면 될 것 같다.
오늘은 따듯한 차 한잔을 가져갔다. 텀블러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모임이 조금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이 중 아직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모임 시작 2분 전이 돼서야 그가 들어섰다. 오랜만에 온 그에게 다들 인사를 건넸다. 나도 괜히 어색한 눈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티 나지 않게 그가 있는 쪽을 한 번 힐끔거렸다.
“다들 과제해오신 거 봤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내 이야기를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거,
참 어려운 일이죠?
아. 그리고 마지막 6회 차는,
우리 수업 시간에 청년센터를 대관해서
작은 출간 발표회를 하려고 해요.
그때 소소하게 지인들 초대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간단한 인터뷰도 함께 진행할게요.”
“으앗. 나는 아무도 초대 안 해야지.”
모임원 중 한 명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누구를 초대하지? 우선 정이는 꼭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같은 동네 사는 희주도 오면 좋을 텐데.
각자의 글이 테이블 위에 한 부씩 놓였다.
“과제 첨삭하기 전에, 오늘은 인생 그래프를 한 번 그려볼까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억나는 순간들을 점수로 표현해 보면 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 고민이 내려앉았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오랜만에 오신 하늘님, 먼저 말씀해 주실래요?”
“아… 네.”
하늘은 잠시 뜸을 들이다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홀로 저희를 키우셨어요.
그러다 우연히 피겨를 시작하게 됐고,
선수 생활을 하며 많이 몰입했죠.
그런데 고등학교 때 큰 부상을 당하면서…
꿈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진은… 그 시기에 만났어요. 위로가 되고,
새로운 길이 되었습니다.
이후엔 감사한 순간들도 있었어요.
의미 있는 작업도 했고 보람도 느꼈고요.
그런데 작년에 몸이 굳는 증상이 왔고
한동안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병명을 알게 됐고 지금은
천천히 일상을 회복 중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손끝이 조금 차가워졌다. 멈춰야 했던 순간, 이유를 모른 채 아파야 했던 시간. 전혀 다른 삶인데도 무너진 지점이 닮아 있었다.
하늘은 자신의 언어로 그 시간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어디쯤에서 멈춰 서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인생 그래프를 그린다면 지금은 어디쯤일까.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맴돌았다. 바닥은 지났을까. 나중엔 이 시간이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오늘따라 피곤이 더 깊게 몰려왔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정이의 말이 떠올랐다. AI가 고민 상담도 해주고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말.
지금 나는,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어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