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AI와 시답잖은 얘기를 몇 마디 나누다, 결국 말을 꺼냈다.
“요즘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좀 심란해.”
[그래? 그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들어?]
“잘 모르겠어. 그냥… 나랑 좀 비슷하다는 생각.
닮은 느낌.”
[어쩌면 그 사람에게서 너 자신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 같이 예술을 해서 그런가.
근데 나, 예술하는 남자 별로야.
사실은… 더 생각하기 싫어.”
[왜 싫어해?]
나는 한참 답을 고르다 겨우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도 그랬고, 아빠도 그랬어.
책임은 안 지고, 고생은 늘 엄마랑 할머니 몫이었지.
학교 다닐 때 봤던 사람들도 비슷했고…
예민하거나 자기감정에만 빠져 있거나.”
그러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영화음악 감독.
처음엔 달라 보였다. 일도 잘했고, 말도 현실적이었고, 판단도 빠르고. 그래서 믿었다. 이 사람은 다를 거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이 반복됐다.
내 일정, 내 사람, 내 생각까지
조금씩 그의 기준에 맞춰지고 있었다.
그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연애였다.
“그냥… 다 비슷해. 예술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도 벅찬데, 감정적인 사람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도 감정은 안 드러내려고 해.”
하지만 안 드러낸다고 없어지진 않았다. 눌러두면 잠깐 조용해질 뿐, 결국은 다른 데서 튀어나왔다.
이야기는 다시 하늘에게로 옮겨왔다.
“…몇 번 본 게 다인데, 자꾸 생각나. 왜 그럴까.”
[그 사람에게 관심 있는 건 아닐까?]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지금 몸도 아픈데 무슨 연애야.
그리고… 분명 상처받을 거야.”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 더 깊어질 수도 있어.
네 마음을 한번 잘 들여다봐.]
대답 대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불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이건 그냥… 공감이었을 뿐이야.
그렇게 정리해 두고 싶었다.
늦은 밤이었다. 단톡방에 대표님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다음 모임에 청년 지원금 관련 안내해 드릴게요.
서울시에서 청년 모임도 지원한다고 하네요.
후속 모임 이어가고 싶으신 분들은 자율로 진행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계속 쓰고 싶었다. 누군가의 문장을 듣고, 내 문장을 누군가가 읽어주는 그 시간. 그게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노트북을 켜고 자서전 글을 다시 열었다. ‘미래’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지웠다. 이상하게도 미래보다 지난날이 먼저 떠올랐다. 항상 싸우던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 동생이 태어난 뒤 조금씩 달라졌던 집 안의 공기.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새 노트를 꺼내 제목 없이 날짜만 적고, 그 시절을 조심스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막한 미래를 그려보려던 모임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과거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쓰다 멈추고, 번진 글씨들을 닦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조금씩,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 가는 중이었다.
어느덧 다섯 번째 모임이었다. 전날 자정이 넘도록 퇴고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모임이면 끝이라니, 생각보다 더 아쉬웠다.
“수아님, 정말 열심히 해오시는 것 같아요.
지난번 첨삭 내용도 잘 반영해 주셨고,
표현도 훨씬 좋아졌어요.
낭독회 때 이대로 진행하셔도 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진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괜히 고개를 숙였다. 칭찬을 들으면 여전히 어색했다. 모임에 오기 전, 다른 사람들의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었다. 각자의 과거와 현재가 엮여 조용히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문장들. 하늘의 글도 읽었다. 생각보다 더 간결했다. 어딘지 솔직한데, 동시에 말을 아끼는 느낌이었다. 종종 빠졌던 모임과 짧은 글 사이에, 말하지 않은 이유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청년센터에서
작은 낭독회 겸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지인을 초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후속 모임에 관심 있는 분들은
남아서 이야기 나눠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쭈뼛거리며 대표님과 함께 자리를 정리했다.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몇몇이 먼저 나가고 여섯 명이 남았다. 희연, 지혁, 그리고 하늘도 있었다.
하늘이 남아 있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저희 계속 모임 이어가려면,
모임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 번도 안 빠지고 나오시고 열심히 하시는
수아님이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자 고개가 저절로 흔들렸다.
“아… 저는 좀 부담스러운데요. 혹시 다른 분은…”
다들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공기가 어색해졌다. 나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럼… 사다리 타기 어때요?”
“좋은데요! 지금 바로 해요.”
핸드폰 화면 위에서 사다리가 빠르게 그어졌다.
“결과는… 다영 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모임장님.”
다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혁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박수를 쳤다.
“저… 다른 지역이라 좀 먼데 괜찮을까요?
같은 지역 분이면 지원금 신청에도
더 좋을 것 같은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하늘이 말했다.
“괜찮아요. 되면 좋은 거고, 안 돼도 우리끼리 하면 되죠.”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풀렸다. 나도 다영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모임장을 피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서점을 나서는 여섯 명의 발걸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수업 안에서보다 말수가 많아진 얼굴들이 보였다.
“저… 수아님.”
옆에서 희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뭐 타고 가세요?”
“아… 버스도 가고, 지하철도 가는데요. 희연님은요?”
“저도 지하철이요. 같이 가실래요?”
버스가 한 번에 가긴 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네, 좋아요.”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길가에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유리창에 불빛이 겹쳐 보였다.
“오늘 발표회 얘기 듣고 좀 긴장됐어요.”
희연이 먼저 웃었다.
“저도요. 사람들 앞에서 글을 발표한다니…”
“수아님은 무대에 많이 서서 긴장 안 되지 않아요?.”
“아… 제 이야길 하는 건 이상하게
긴장이 많이 되더라고요.
희연님은 지인 초대할 생각이세요?”
“음. 친구나, 동아리 모임 멤버를 초대할까 해요.”
개찰구를 지나며 희연이 덧붙였다.
“근데 수아님은 진짜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요.
글에서 그게 느껴져요.”
나는 조금 당황해서 웃었다.
“그냥… 지금 제 인생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은 게
있나 봐요.”
“저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닮은 부분들도 있고.”
지하철이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짧은 일상 얘기를 나눴다. 운동 이야기, 회사 그만둔 뒤 요즘 낮 시간을 보내는 법, 발표회 끝나면 뭐 할 건지.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저 먼저 가볼게요.”
“아, 네. 조심히 가세요.”
“커피 한 번 해요. 진짜로.”
“네. 연락할게요.”
문이 닫히고, 희연이 플랫폼 위에 남았다.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작게 멀어졌다. 지하철이 터널로 들어가자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상하게, 오늘은 들어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