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각자 써온 버킷리스트를 나누기로 했다. 어느새 스며든 일상이 자연스러워진 시간이었다.
“저는 세 가지를 썼어요. 첫 번째는…
제 책을 내고 싶어요.
에세이로 쓸지, 소설로 쓸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직 고민 중이에요.
두 번째는 스페인에서 연주를 해보고 싶어요.
큰 무대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여행하다 가볍게, 자유롭게 연주해 보고 싶어요.
마지막 세 번째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싶어요.
노력한다고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정말 온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말을 마쳤을 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하늘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중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으로 나의 오른쪽에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사진전을 열고 싶기도 하고요.
제일 먼저 그 사람에게 보여주면 좋겠네요.
그리고… 주말마다 가는 보육원이 있는데,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60대쯤 이루고 싶던 꿈이 떠올랐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꿈이었다.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함께 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어 오늘 이 날을 기억하냐고 물으며 함께 추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영이 수첩을 꺼냈다.
“찾아보니까 10대 때 적은 버킷리스트가 있더라고요.
하하. 100개도 넘던데. 이번에 세 보니까
몇 개 안 했더라고요.
작고 소소한 것들, 엉뚱한 것들이 있는데
그냥 하면 되는 건데 왜 안 했나 모르겠네요.”
“다 같이 봐도 돼요?”
희연의 말을 시작으로 다 같이 버킷리스트를 돌려봤다. 작고 귀여운 글씨체의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새벽 기차 타고 혼자 여행 가보기
하루 동안 휴대폰 없이 하루 보내기
아무 계획 없이 지하철 타고 아무 데나 가보기
친구랑 하루 동안 서로 인생 바꿔 살기
아무 이유 없이 친구에게 편지 쓰기
별 보면서 밤새 이야기하기
다영은 처음엔 조금 차가워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른 모습들이 보였다. 낯을 가려서 말수가 적을 뿐이지 친해지자 유쾌한 농담들을 늘어놓곤 했다. 작은 키에 조그마한 입, 늘 쓰고 오는 벙거지 모자가 만화에 나오는 매력 있는 캐릭터 같았다.
그녀의 엉뚱한 버킷리스트들을 보며, 어릴 적의 다영을 잠시 상상해 봤다.
“와 이 버킷리스트 정말 좋네요.
저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언제 다들 별 보면서 밤새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다음으로 지혁이 수첩을 가져가며 바라봤다.
“저는 친구랑 하루 동안 서로 인생을 바꿔 산다면…
아, 반나절 만에 도망갈 것 같은데요?”
지혁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모임을 정리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하늘이 조용히 말했다.
“아, 저… 앞으로 좀 바빠질 것 같아서요.
당분간 모임은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쉬움이 섞인 정적이 잠시 흘렀다. 민서가 먼저 말했다.
“그럼, 오늘 마지막으로 같이 밥 먹고 가요.”
“좋죠. 같이 가요.”
여섯 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이라 가볍게 맥주를 마시러 펍으로 이동했다. 따듯한 피자와 함께, 나와 하늘을 제외한 넷은 맥주를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민서가 물었다.
“하늘님 이상형은 어떤 분이에요?”
하늘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상형이 바뀐 것 같아요. 지금은 밝은 사람이 좋아요.”
나는 먹던 피자를 내려놓고 질문했다.
“오. 예전의 이상형은 어땠는데요?”
“음… 동양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어요.”
이상형이 왜 변한 걸까. 나는 동양적인 느낌은 아닌데.
다들 웃으면서 일상 이야기, 연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 귀에는 흘러가는 듯했다. 그저 식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자 꼬다리만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 님.”
“몇 번을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히히.”
민서가 나를 툭툭치고 나서야 알았다.
“아. 죄송해요.”
지혁이 내 빈 잔에 물을 채워주며 말했다.
“수아 님은 이상형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아…”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얼마 전, 희연에게는 뭐라고 했었지?
“음… 저는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좋아요.
그리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
아 어렵네요. 그냥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언니 솔직히 인기 많았죠?”
민서가 신이 난 표정으로 묻자 갑자기 관심이 나에게 몰렸다. 나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내 매력에 빠진 거예요?”
“언니 처음 봤을 때 부자처럼 보였어요. 백화점 1층에서 쇼핑할 것 같은.”
부자처럼 보인다니, 의외였다. 그냥 깔끔하게만 입고 다녔는데.
“안 되겠다. 밥 얻어먹으려고 그러는 거죠? 날 잡아요.”
희연이 능글맞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남자였으면 사귀었다니까~ 아 아쉬워.
우리 수아 데려갈 사람 없나.”
나도 모르게 하늘과 마주친 눈을 피하려다 지혁과도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 다들 정말?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이상하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도 안 마시는데 이게 무슨.’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일까.
거울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려봤다.
‘밝은 사람. 나도 친해지면 웃긴 사람인데.’
자리에 돌아오자 왜 이제야 같이 밥을 먹었나 싶을 만큼 분위기가 가까워져 있었다.
“정말 종종 올 거라니까요?”
“에이 그짓말. 그짓말은 안 믿어요~
진작 같이 밥 좀 먹을 걸.
아. 언니 오빠들, 우리 다음에도 밥 먹어요.
하늘 님 못 빠져나가게.”
민서가 아쉬움을 비치자 희연이 앞장섰다.
“아. 그럼 나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집들이할게요.
건강하게 한식으로 쫙! 다들 마실 술과
음료만 사가지고 와요.”
다영이 희연에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딱 날짜 잡아 딱이야. 우리 단톡방에서 투표한다?”
“아무렴요. 모임장님 말씀 들어야지요. 다들 알겠죠?”
막차가 끊기기 전, 다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들어가세요.”
웃으며 인사하는 하늘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다시 올 거냐고.
“잘 지내세요. 하늘 님.”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삼킨 채 어색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희연 님, 저 늦어서 버스 타고 가볼게요.
다음에 같이 가요.”
“밤이 늦었네요. 저도 그래야겠어요. 다음에 봐요.”
뭘 타든 시간은 비슷했다. 그냥 혼자 가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적막한 밤거리에는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주황빛 가로등 아래 다정해 보이는 커플이 보였다.
“우리 야식으로 라면 하나만 딱 끓여 먹자니까.”
“오빠, 안 돼. 나 살쪘단 말이야.”
“이그. 이쁘기만 하구만. 뭘 해도 이뻐.”
다들 돌아갈 집이 있구나.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괜히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골목이 으슥해져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문 안쪽에서 모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카야 엄마 왔어.”
문이 열리자마자 모카가 다가왔다.
내 집은 모카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