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화
희연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일 그쪽에 갈 일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점심 먹을래요?]
점심이라… 잠시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다음날 가게 근처의 백반집이었다. 희연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들어섰다.
“밖에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자취하다 보니까
이런 집밥 같은 백반이 좋더라고요.”
희연이 보냈던 메뉴들은 하나같이 건강한 음식들이었다.
“근데 더 좋은 거 먹어도 되는데.
수아 님 밥 사주고 싶었어요.”
“저 여기 생선구이 좋아해요. 에이.
저희 지금 둘 다 일도 안 하는데요 뭐.
먼저 일하는 사람이 나중에 좋은 거 사기로 해요.”
음대를 나와서 그런 걸까. 여자가 많은 곳은 항상 어려웠다.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말을 아끼게 됐다. 뒤에서 다른 이야기가 오가는 걸 몇 번 겪고 나서였다. 한 발짝거리를 두고 상대방을 지켜보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대부분 은 나를 어려워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친구를 사귀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근데 처음 봤을 때 희연 님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멋있다고요?”
“네. 축구 동아리를 드는 여자도 처음 봤고,
오래 한 것도 멋있고
백수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모습도요.
기억에 남았어요.”
“하하. 그래요? 저는 수아 님하고 친해지고 싶었는데.
저 예전에 바이올린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다시 일하게 되면 레슨비 벌어서 배우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가르쳐 주세요.”
음식이 식어가는 줄 모르고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미지근해진 콩나물국도 바짝 튀겨진 조기 살도 맛있게 느껴졌다.
“잘 먹었어요. 커피 한잔 할래요? 제가 살 게요.”
비싼 프랜차이즈 카페를 지나치고 희연이 고른 곳은 저가형 매장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따듯한 캐모마일 차를 가지고 둘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쌀쌀할 때 봤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네요.
커피 마시니까 살 것 같아요.
아. 어제 엄마가 전화로 저한테 누구 소개받으라고 잔소리하더라고요.
백수가 무슨 연애냐고 했는데…”
남 일 같지 않았다. 며칠 전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휴 엄마가 선보라고.
몸도 아프고 다른 일도 찾아봐야 하는데.
몸이 이렇게 되니까 자존감이 떨어지더라고요.
누가 이런 나를 이해해 줄까.”
희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니 수아 님. 내가 남자라면 수아 님한테 당장 사귀자고 고백했을 거예요.
왜 남자들은 이런 스타일이 없는 거야.”
“하하. 우리가 이래서 친해졌나 보다.
근데 정말 연애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연애 안 한 지 10년은 됐나 봐요.
일하고 축구하다 보니까 힘들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희연은 연애를 안 하고 싶기보다는 회피하는 느낌에 가까워 보였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 좋아요. 어쩌다 보니
직장인, IT 계통의 사람만 만났는데.
근데 이제는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요즘은 주체성 있는 사람,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
사람이 멋있게 느껴지네요.”
희연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흠. 수아 님. 기준이 달라진 이유가 있을 텐데?
누구 있는 거죠?”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산 아래에서 어깨가 젖어 있는 모습이.
아직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있긴요.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연애할래요.
희연 님부터 했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거 보고 싶어요.”
이제 가게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요.
다음에는 가게 놀러 올래요?
찜질해도 되고, 차도 한 잔 드릴게요.”
가게에 초대한다는 건 나에게는 큰 용기였다. 모임에 스며들었던 걸까. 내 상처도 힘든 상황도 그저 묵묵히 봐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정말요? 좋죠. 나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 연락해요.”
먼저 다가온 한 발자국에 편하게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게다가 한 살 언니라 더 좋았다. 이상하게 주위에는 동생들만 있었다. 친척들 중에서도 첫째, 집에서도 장녀, 친한 지인들도 동생이 많았다. 왠지 윗사람들은 어려웠다.
‘다음에는 말을 놓으라고 해봐야겠다.’
어느덧 깊은 밤이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책을 펼쳤다.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
나는 뛰기만 하며 살지 않았을까. 인대가 늘어나고 무릎이 상했는데도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바라본 적은 언제였을까.
그 사람은 걸으며 시선에 작은 것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자들이 번진 수첩을 꺼냈다. 어릴 적 첫 기억부터 써 내려간 이야기가 이제는 현재에 닿아 있었다.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몸이 시릴 만큼 아팠고 며칠씩 앓아누운 날도 있었다.
피하고 싶어 도망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왔다.
아프면 아픈 대로, 그 고통을 품었다.
안아 준다
괜찮다고
힘들면 어쩔 거냐고
꾹꾹 눌러오던 지난날들
사실은 괜찮지 않아서
일어설 힘마저 쥐어 짜내던
넘어져 있을 줄 모르던
지난날들
참는 것 밖에 몰라
속수무책으로 튀어나오는 눈물을
꺽꺽거리며 삼키던 날들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버티느라 고생했구나
나라도 알아주자며
이제야 안아 준다
나를
그동안 나를 왜 이렇게 미워했을까. 근원을 타고 들어가 보니 이제야 보인다. 홀로 외롭게 뒀다는 것을.
‘고생했다…’
그 한마디를 내뱉고 이불로 내려갔다. 몸을 말아 감싸안았다. 울음소리는 점점 꺽꺽거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숨을 죽여 울음을 삼키다 아이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눈치를 보던 모카가 천천히 다가왔다.
“모카야…”
내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멈추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나’ 자신. 인내와 경험으로 단단해진 나라는 사람이.
글을 써야겠다. 세상 어딘가의 ‘나’를 대신 안아주고 싶다. 나는 젖어서 해진 수첩을 안았다.
작은 걸음을 내디딘 줄 알았다. 훗날 어떤 작품을 남길지 모르고, 그저 이 당시를 기록한 줄만 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