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벌써 모임 날이다. 지하철역으로 올라오니 투두둑, 굵은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물비린내가 났다. 분명 오늘 비 소식은 없었는데. 그냥 뛰어가기엔 쫄딱 젖을 게 뻔했다. 지도 어플을 켜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찾았다. 4분 거리. 뛰어가야 할까. 화장이 다 지워져 엉망이 될 텐데.
그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님, 뭐 하고 계세요?”
고개를 들자 하늘이 서 있었다. 검은 우산 아래, 머리가 살짝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아, 하늘님… 갑자기 비가 와서요. 우산 사려고 편의점 찾아보고 있었어요.”
“장마라서 그런가 봐요. 날씨가 변덕이네요. 저 우산 있으니 같이 쓰시죠.”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더 젖으실 것 같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비슷해요.”
조심히 그의 우산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혼자 쓰면 적당할 크기, 둘은 좁아 보였다. 팔 끝이 살짝 스치자 우산 끝으로 한 발자국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빗소리가 우산 위를 세게 두드렸다. 하늘의 어깨가 반쯤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우산이요.”
“네?”
내 목소리가 안 들렸는지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늘님 쪽으로 더 드셔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그럼, 조금만 옆으로 갈게요.”
한 뼘 옆으로 다가온 그의 우디한 향기가 코끝에 머물렀다. 젖은 공기와 섞여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한 뼘이 이렇게 좁았었나. 왜 긴장이 되지.’
혹시나 그에게도 들릴까 괜히 움찔했다.
무뚝뚝한 줄 알았던 그가, 이상하리만치 다정해 보인다. 자꾸 영화 속 장면과 겹쳐 보인다.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정작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 일찍 오셨네요?”
“아 네.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을 안 좋아해서요. 여유 있게 가는 편이에요.”
앞으로 나도 일찍 올까. 기왕 온 김에 책도 읽으면 좋지 뭐.
생각보다 금방 카페에 도착했다. 습기와 커피 향이 섞여 코를 간질였다. 따뜻한 디카페인 카페라테를 시키자, 블라인더에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그는 아이스 녹차라테를 시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
“걷는 거 좋아하세요?”
“네… 저는 보통 걷는 편이에요. 교통편을 타는 것보다 웬만하면 걸어요.
이 책 좋은데 한 번 읽어 보세요.”
나는 수첩 귀퉁이에 책 제목을 적었다.
“저도 요새 매일 책 읽고 있어요. 밤마다 필사도 하고요.
다른 책도 추천해 주실래요?”
그가 말한 여러 권의 책들을 받아 적었다. 사유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같은 예술가로서 비슷한 시각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다니던 노트를 펼쳤다.
‘칫. 사람이 앞에 있는데 대화 좀 하지.’
나도 모르게 삐진 고양이 이모티콘을 그렸다.
“키우는 고양이랑 닮았네요.”
“앗.”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모카예요. 서른 살부터 같이 키웠는데
엄청 순하고 귀여워요. 사진 보실래요?”
모카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끔한 눈썹 라인, 속쌍꺼풀에 깊은 눈매, 말끔한 콧등, 살짝 올라온 입꼬리. 실제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재빨리 시선을 거두느라 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항상 필요한 말만 하는 듯했다. 예의 바르지만 낯을 가리는 듯한 눈빛, 도저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
그도 핸드폰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봤던 강아지라며 사진들을 보여줬다. 친구가 찍어줬다는 동영상에는 강아지들과 뛰어다니며 노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도 이런 표정을 보고 싶다.‘
그때 지혁이 반대편에 앉았다.
“둘이 무슨 재밌는 얘기를 그렇게 해요.
하하 나도 보여줘요.”
지혁도 모카의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너무 귀엽다 진짜. 근데 수아님은 오늘도
따듯한 라테네요?”
“아…네. 항상 저만 따듯한 걸 마시는 것 같아요.
여름인데.”
곧이어 한 명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다영까지 자리에 앉자, 한 명씩 돌아가며 간단히 느낀 점과 발제문을 나누기로 했다. 희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인공이 하루를 다시 살면서 진심을 표현하는 장면… 그게 제일 인상 깊었어요.
만약 저한테도 그런 하루가 온다면, 어떤 하루를 다시 살고 싶을까 싶더라고요.
다들 어떤 하루를 선택하실래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표현하지 못해 후회했던 날이 언제일까. 내가 그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던가. 하늘의 차례가 되었다.
“저도 표현을 잘 못하고 사는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처음으로 오래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추억을 보내는데
그날을 쓸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사랑이 온다면, 후회하지 않게
용기를 내보고 싶네요.”
용기를 내 본 적이 있었던가. 짧은 순간 되짚어봤다.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기보단,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먼저 경계했던 기억들을.
처음 듣는 그의 연애사였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오. 하늘님은 연예인도 많이 아실 것 같은데. 혹시 어떤 분야의…”
막내인 민서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모델인데… 이름 얘기하면 알 것 같아서요.”
모델이라니, 그와 잘 어울렸겠지. 이름을 알 만한 정도라면, 누굴까.
“언제 다들 밥 한 끼 하면서 얘기하시죠.
연애 이야기 재밌잖아요.
저도 지난 연애보다는, 앞으로 영화 같은
그런 애틋한 연애를 하고 싶네요.
표현을 많이 하는 성격인데 다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지혁 님은 장난기도 많고 다정한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없으세요?”
민서가 제일 신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막내라 나이 차이가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하. 만나겠죠.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이제 수아님 차례네요.”
연애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상대방이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들 표현을 이야기를 하셔서…
저는 용기 내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여러 번 봤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믿기 힘들어도 좋으니까 말해주지.
혼자만 아는 고통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제가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혼자 감당했을 시간이 자꾸 떠올랐어요.
혼자만 알고 있었을 시간들이요.
만약에 제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받는 것보단 이번에는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임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자, 다영이 어플을 켜며 말했다.
“그럼, 오늘 발제문 중에서 다음 글 주제를 뽑아볼까요?”
랜덤 추첨이 시작됐다. 당첨자는 나였다.
“수아님의 주제는 버킷리스트네요.
다음 시간엔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주제로
글을 써오는 걸로 해요.
다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는 희연의 우산을 같이 썼다. 집에 와서 다 젖어 꿉꿉한 셔츠의 어깨를 바라봤다.
왜 비는 와서.
우산을 써도 다 젖잖아.
“난 이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