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바람이 지나간다

스며드는

by 설안

고민 끝에 펜 끝을 두드리다 밤마다 정리하듯 써왔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저는 요새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수업이 계기가 되어서 벌써 몇 달이 됐네요.

어렸을 때의 첫 기억부터 하나씩 다 쓰고 있어요.

걸어온 길을 보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좀

이해가 되더라고요.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너무 달라서

힘들었던 시간이 많았어요.

켜켜이 쌓아왔던 묵은 감정들을

조금씩 해소해 보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다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회사에서 정말 싫은 상사를 만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요.

상대를 안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누굴 미워한다는 게, 용서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더라고요.

다들 그런 적 없으셨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다들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을 한 명씩 꺼내놓았다. 나는 고민 끝에 말했다.

“정말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마음껏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고 있었더라고요.

어느 날 알았어요.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거구나.

그걸 인정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러자 켜켜이 쌓였던 감정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해 주자고 생각했어요.”


희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누구…”

“제 아빠예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오래된 장면이 하나 스쳤다.


“그러니까 밥을 왜 안 해. 아빠 일하고 오면

배고프니까 밥을 해 놨어야지.”

그의 얼굴은 화로 얼룩져 있었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뒤 돌아.”

열두 살의 나는 쭈뼛거리며 뒷걸음질했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손에는 몽둥이가 쥐어있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던 나는 힘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얼굴에 맺혔던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매질도 끝났다. 나는 구석으로 가 숨죽여 울었다.


그날 저녁은 없었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밥 해주는데.

나도 엄마가 한 밥을 먹고 싶은데…

나도 깜빡했단 말이야.’


억울함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어린 나는, 밤새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보며 그보다 아픈 마음을 바라봤다.



짧게 적막이 흘렀다.


“가족은 용서하기 더 쉽지 않나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다. 악의 없는 민서의 얼굴을 보며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


‘괜히 말했을까. 이게 뭐 좋은 이야기라고.’


순수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민서에게 하늘이 한마디 덧붙였다.

“가족이라서 더 용서하기 힘들 수 있어요.

수아님 대단하네요. 그 힘든걸…”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까. 왠지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괜히 식은 컵을 만지작거렸다.


희연이 입을 열었다.

“저도 엄마가 보수적이고 집착이 심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요즘 많이 하고 있는 생각인데…

엄마가 한 말들에 많이 갇혀있었더라고요.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무리하며 살아왔었어요.

이제야 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해요.

근데 저도 누군가를 용서하는 게 아직 안 되는데.

수아님은 정말 단단한 사람 같아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나누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지혁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아빠가 무뚝뚝해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좋은 부모도, 좋은 자식도 어려운 것 같네요.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릴 때 상처 하나쯤은 다 있지 않나 싶어요.

그나저나 다들 이렇게 깊은 얘기를 하니까

가까워진 것 같고 좋네요.”


다영이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저도 우리 모임 좋아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고 배우는 것도 많고.

아참, 다음 모임의 주제를 정해볼까요? 이거 어때요?”


각자가 좋아하는 영화를 하나씩 말하고, 그중에서 골라 발제문을 나누기로 했다. 나는 여러 가지 영화 중에 고민하다 If Only를 말했다. 마지막에 남은 건 If Only와 Soul이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환데… 이거 했으면 좋겠다.”

그의 눈이 잠깐 내 쪽으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If Only에 손을 들었다.


‘이게 뭐라고 신경이 쓰이는 걸까.’


어느덧 주말 저녁이 되었다. 오늘은 글을 쓰는 대신 If Only를 보기로 했다. 20대 때 몇 번을 봤더라. 지금 본다면 그때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겠지.


남자 주인공이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하루를 온 마음으로 살아내는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잠시 영화를 멈췄다.


‘만약, 지금 내게 하루가 남는다면…

나는 뭘 하고 싶을까.

당장 달려갈 것 같아.

나도 모르던 진심이었다. 언제 이렇게 커졌지. 무서운 마음에 재빨리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얼마 보지 못하고 화면을 꺼버렸다. 그냥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결국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은 때때로

향기를 실어다 주고

계절을 실어다 줬다


향기를 잡을 수도

계절을 잡을 수도 없는

흘려보내야만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향기를 맡고

계절을 느끼는 것뿐


너는 스쳐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간다



‘나 혼자 하는 생각이잖아.’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가는 감정일 거야.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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