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다른 자리에 서다

여운

by 설안

하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센터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늘이 문을 잡아주었다. 안쪽에는 이미 몇몇 얼굴이 먼저 와 있었다.

“수아 님, 오. 오늘 완전 차려입으셨네요?”

말끔하게 하얀 셔츠를 입은 지혁이었다.

“지혁 님도 마찬가진데요? 글도 열심히 쓰셨더라고요.”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나는 가방을 올려두고 테이블마다 글을 올려두는 대표님을 거들었다. 시작 시간이 다가올 즈음, 정이가 꽃을 들고 도착했다.

“정이야, 뭘 또 이런 걸 사 왔어. 정말 고마워.”

“우리 최수아 작가님 발표회인데

그냥 올 수는 없지. 히히.”

“작가님은 무슨… 감동이야, 진짜.

네가 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내가 뒤에서 사진 많이 찍어줄게.

오늘 파이팅이야. 멋져.”


나는 정이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맞다, 수아야. 나 내일 레슨 전에

너희 가게 근처 갈 일 있는데, 점심 먹을까?”

“좋지. 맛있는 거 먹자.”


시작 직전, 희주도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

“헉… 언니. 후… 간신히 도착했네.

근데 언니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예쁘긴… 고마워, 희주야. 여기 음료수 좀 마셔.

오느라 고생했어.”

“언니 보니까 좋다. 오늘 완전 작가님 같아!”

“으이구… 오느라 고생했어. 얼른 앉아.”


대표님이 무대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청년 센터의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위로 각자의 글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쓴 글도 저기 어딘가에 놓여 있겠지.

“안녕하세요. 출간 발표회에 오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저는 ‘따뜻한 쉼표’ 대표입니다.

두 달 반 동안 글 쓰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소중한 분들과 함께 미래의 소망을

그려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수가 이어졌다. 나는 정이와 희주를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두 분씩 모시고 글에 대한 설명과 인터뷰를

진행해 보려고 하는데요.

테이블 위에 있는 글들이 우리 작가님들 글이에요.

같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희연님? 희연님 나오실까요?”


으… 첫 순서라니 떨리겠다. 그런데 그녀는 별로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희연 님이 같이하실 분 정해주세요.”

“음… 저는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수아 님이요.”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쭈뼛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볍게 침을 한 번 삼키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희연의 글에 대한 대표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농담이 섞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희연 님의 글을 보면, 가치관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외곽에서 자연과 함께 자유롭게 사는 걸 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대표님의 질문에 희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독립영화나 예술 작품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만의 세계가 독특한 사람이

좋더라고요.

실제로 만나면 삶이 고단해질지 모르겠지만…

무튼 얼굴은 하얗고 뽀얀 사람이 좋아요.

약간 마른 듯한?”


희연의 순서가 끝나고 마이크가 내게로 건네졌다. 손에 땀이 났다. 잠깐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다.

“수아님,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셨어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음엔… 그냥 저 자신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삶이 너무 엉켜 있었거든요. 아파서 음악을 쉬면서

모든 게 멈춘 줄 알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멈춘 게 아니라 그냥 천천히

걷고 있는 중이더라고요.”

객석 쪽에서 정이와 희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 울컥했다.


“미래의 자서전을 쓰면서 발견한 게 있다면요?”

나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처음엔 아픈 순간들만 떠올랐어요.

그땐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그 기억들이 그냥 하나의 장면처럼 보이더라고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게 아니라,

모든 순간이 저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그리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또 미래의 나를 만들어갈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 고요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처음 내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가 조심스러운 박수가 울렸다.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수아님 글 너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작은 봉투들을 꺼냈다.

“제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별건 아니지만…”

“에? 선물이요?”


봉투 안에는 고양이 모양의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

“두 달 반 동안 같이 글을 썼잖아요. 기념으로요.”

“와 귀엽다.”

“이거 수아님 고양이 닮은 거 아니에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고양이 이름이 뭐였죠?”

“모카요.”

“아 그래서구나.”

그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 사진 찍어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하나둘 인사를 나누고 센터를 나섰다.

집에 오니 긴장이 풀리며 피곤이 밀려왔다. 꽃을 꽂을 데가 없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꽃병…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려야겠다. 꽃을 식탁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오늘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내일은 정이를 보기로 했으니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주야. 오늘 바쁜데 와줘서 고마웠어. 잘 들어갔어?“

“응 언니. 오늘 멋지더라. 나 감동했잖아.

아 근데, 언니 그거 알아?”

“응. 뭔데?”

“그… 사진작가라고 했던 분 있잖아.

내가 봤는데 계속 언니 쳐다보던데?”

“내가 인터뷰할 때?”

“아니야. 그때 말고도 쳐다보더라고.

마지막엔 말 걸려고 쭈뼛거리기도 하던데.

근데 언니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서 그냥 가더라.”

“에이… 착각이겠지. 무튼 쉬고, 담에 같이 밥 먹자.”

“응. 언니도 고생했어. 잘 자.”


전화를 끊고 나니 희주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를 건넸다.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나는 음악 말고도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작은 꿈을 품어봐도 되려나.

앞으로도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음악뿐만 아니라

글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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