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빈 Oct 12. 2022

꿈 분석 - 무의식으로의 초대

나의 꿈 분석, 첫 줄을 쓰다.

올해 들어 부쩍 일에 대한 매너리즘과 삶의 무의미함이 심화되었다. 친구들에게 지친다고 얘기하니 다들 쉬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 중에 제대로 쉬어본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워라밸과 욜로를 외치면서 피곤에 찌들어 야식을 시킬지언정 월급의 일부는 적금 넣으며 열심히 산다. 우리는 각자 먼발치서 서로 고통받으며 쉬지 못하는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늘 바쁘게 움직였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했다. 목적 없는 부지런함이 때론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요즘은 곧잘 지친다. 친구 안은 다른 상담전문가에게 상담이나 개인분석을 받아보는 게 어떨지 권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6년 차 상담가로서 나를 통찰하기에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이 압박감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한 분석심리연구소에 연락을 드렸다. 매월 동기들과 함께 상담 사례로 공부하는 모임을 하는데, 모임 슈퍼바이저의 상담선생님이 계신 곳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분이 상담선생님(나)의 상담선생님(슈퍼바이저)의 상담선생님이란 생각에 재미있었다. 그분의 상담선생님은 누구일까 궁금해지면서.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는 인사를 나누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했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 하고 꿈 분석을 받기로 하였다. 꿈을 기록하는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할 때 꿈의 장면들을 천천히 떠올리다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서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완성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MMPI-2, 문장완성검사, Beck우울검사 등 몇 가지 심리검사를 과제로 받았다.


1회기를 마친 날 밤, 자기 전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두었다. 어떤 꿈이 나올지 설레어 일찍 잠들었다. 새벽 네 시 반에 꾼 꿈에는 네 가지 장면이 나왔다. 한밤중에 가만히 누워 꿈의 기억을 곱씹다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글씨를 쓰는 감각에 기대어 종이에 키워드를 적어나갔다. 꿈의 첫 장면 내용은 이렇다.

여러 명이서 같이 식사를 해야 하는데 이봉련 배우가 중화요리를 주문했다.
남동생이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미리 받아 차 본넷 위에서 혼자서 먹었다.
남은 음식을 들고 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낮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먹는데
외할머니가 늘 먹던 맛이 아니라고 하자 이봉련 배우는 다른 가게에서 시켜봤다고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이 새로운 가게 요리는 맛이 없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봉련 배우가 가수 아이유로 얼굴이 바뀌며 혼자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말한다.
"새언니는 나를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어. 늘 나를 낮잡아 불러."
내가 물었다.
"맛없다는 피드백 듣는 거 싫지 않으세요?"
가수 아이유가 대답했다.
"그게 당연한 거지. 그래야 진실되게 연결될 수 있어."

*위의 내용은 실제 인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새벽에 이 꿈을 기억해 적었을 때는 정말 일리 있게 느껴졌다. 꿈의 장면과 느낌도 생생했고. 그러다 잠에서 온전히 깨어 정신을 차리고 적어둔 걸 보니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개연성 없는 이 글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선생님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네 가지 장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꿈에 나온 등장인물들을 떠올렸을 때의 인상, 장면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촘촘히 물었다. 이봉련 배우와 가수 아이유를 떠올리면 어떤 인상이 드는지,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외할머니·남동생·새언니를 떠올리면 어떤지 등.


이봉련 배우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횟집을 혼자 운영하며 아들을 키우는 화정 역할로 인상이 깊었던 배우다. 그의 무뚝뚝하고 대장부 같은 모습에 매료되었었다. 가수 아이유는 여린 모습이 먼저 떠오른 사람이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이봉련 배우가 연기했던 화정 역은 겉으로 단단해 보이지만 내면은 연약한 외강내유, 아이유는 겉은 여리지만 안으로는 단단한 외유내강일 것 같다고 말했다.


외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네 딸을 키웠다. 삶이 고달팠지만 외할머니는 강했고 그의 네 딸도 못지않게 세다. 그중 둘째가 우리 엄마다. 예전에 외할머니는 내게 옛날 얘기를 해주며 네 딸들이 아무 것도 없던 집에서 태어나 지금은 다들 입에 풀칠하고 살고 있으니 감사하고 기특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이봉련 배우와 외할머니의 공통점을 물었고 얼기설기 엮인 인상들을 하나씩 풀어보는데, 목구멍에 커다란 못을 갖다 박은 것처럼 목이 막히고 눈물이 차올랐다. 왜 하필이면 이봉련 배우와 외할머니가 꿈에 나왔을지 대략 알아차려졌다. 둘의 강인하고 저돌적이며 대장부 같은 면모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떠올리면 너무 아팠다. 굳세게 살기 위해 거친 풍파를 견딘 사람들. 자신의 아픔을 꽁꽁 숨긴대도 가까운 사람은 그가 울고 있음을 자연히 알았을 것이다.


늘 우리 집 여자들은 드세다고 생각했다. 모질게 돌직구 날리는 것이 사이다처럼 속 시원한 날도 있었지만 아픈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지. 일찍부터 집에서 독립했는데도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나도 못지않게 드세다. 예전에 만들었던 선인장이라는 노래에 '당신은 날카로운 선인장 같아. 조그만 마음속에 울고 있는 아이 있네.'라고 가사를 썼다. 문득 이 노래가 우리 집 여자들과 나를 향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어렵나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이 어떻고 저떻고 얘기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불만이 있어도 얘기하는 게 그다지 관계에 도움되지 않을 것 같아 숨기게 된다. 계속 대화를 나눈 후에 선생님은 '당신의 꿈은 사람이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진실되게 연결될 수 있음을 얘기하는 걸로 보인다.'고 했다.


꿈 분석의 첫 장면은 앞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장면이라고 한다. 나의 꿈 분석은 '진실하게 연결되기 위해서 싫은 소리를 하고 듣는 것을 잘 마주했으면'으로 첫 줄을 썼다. 선생님은 내 꿈이 꽤 친절한 편이라고 했는데, 앞으로 무의식으로 향하는 여정에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비건 요리 기록 - 구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