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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Nov 20. 2022

집 마루에서 공연했습니다.

여유와 설빈의 특별한 순간 기록

몇 달 전, 여유와 설빈 1집 [모든, 어울린 삶에 대하여]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양군(양현석)이 제주 집에 왔다. 그가 밴드 파라솔웨이브의 드러머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우리의 1집 앨범 작업은 거의 5년 전 일이나, 양군은 한참 전의 연으로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는 소중한 사람이다.


양군은 제주 집에 처음 왔을 때 마당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키위에 관심을 보였다. 키위로 재밌는 일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 키위가 집에 있는 장면은 보기 힘들지 않나, 제주만의 고유한 느낌을 살려서 마당에서 공연을 하면 어떨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렴풋이 생각했다. 집에서 공연하는 걸 항상 꿈꿔왔는데 잘하면 할 수 있겠다고.


2014년에는 부산에 살았다. 그때도 채소요리에 관심이 있었고 나까님이 운영하는 '나유타카페'에 종종 가곤 했다. 그곳의 음식을 맛보면서 뮤지션 이내님과 여러 명이 지내는 공간인 '생각다방 산책극장'을 알게 되었고, 그 공간에서 홈메이드 콘서트를 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알게 됐다.


2014년의 한 날은 '생각다방 산책극장'에서 이내님과 피터아저씨, 싯타르를 연주하는 찬님의 공연을 보았다. 공연 전에는 생각다방 산책극장 식구들이 직접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관객들과 함께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다. 직접 바질 페스토를 만들고 뚝딱 파스타를 만들어 같이 먹는다니. 그런 식사를 대접받았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실로 강렬하게 기록되어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하나의 모델로.

2014년 홈메이드 콘서트 뒤풀이 자리에서 여유의 EP앨범에 수록된 '이해'를 불렀던 사진. 이때는 여유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2022년, 여유와 설빈에게 기회가 왔다. 양군의 제주 집에서 공연을 하면 좋겠다는 말이 도화선이 되어, 예전 홈메이드 콘서트의 좋았던 기억도 떠올리고 손님들이 오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어렴풋한 계획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11월의 어느 날 키위를 매개로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보잔 약속을 했고 CTRsound의 기획으로 뮤지션 정우와 함께 제주 집에서 펼쳐질 공연을 선명히 그려나갔다.


그 공연을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전 일곱 시쯤에 눈이 번쩍 떠졌다. 창밖으로 비 오는 소리가 투둑 투둑 들렸고, 비가 온다는 어제의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오전 열 시가 되어갈 무렵 여유에게 양군과 소통해보라고 재촉하였고 비가 온다는 작금의 상황에 양군이 '에헤이 조졌네'라고 답을 한 것을 보고 약간의 절망감이 들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구나.

비가 오는 오전 여유와 양군의 카카오톡 대화
어제 분명 낙엽을 열심히 쓸었는데, 오전에 보니 떨어진 나뭇잎이 초록 잔디밭을 거의 뒤덮고 있었다.

CTRsound 식구들은 오후 한 시 반 즈음에 집으로 와 상황을 살폈다. 양군과 이전에 얘기할 때는 마당에 있던 커다란 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를 상상했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급하게 배경을 집 마루로 바꾸었다. 전자기기들이 비 맞지 않게 세팅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했기에..

서울에서 남도로 와 배 타고 들어온 기기들
오늘 공연 [키위피디아]의 귀여운 포스터
정우 리허설 중, 비를 막을 타프를 설치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
여유와 설빈 리허설

CTRsound와 함께하는 리허설은 별로 걱정이 없었다. (개인적으론 그리웠던)까르푸황의 날카로운 디렉팅에 들리는 소리가 보장됐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다만 바깥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하여 관객들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일었다. 썰렁한 몸들을 데워야 한다는 강박 아래 편의점에서 와인을 몇 병 사 급하게 뱅쇼를 만들었다. (키위피디아 콘셉트에 맞게 키위도 몇 개 넣었다.) 집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해본 적이 없어, 집안의 모든 컵들이 총출동했다.


급하게 준비한 뱅쇼와 집안의 거의 모든 컵들

정우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여유야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며 만났겠지만 난 서울에 갈 일이 손에 꼽을 정도여서 만나기가 어려웠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서로 눈시울이 붉었다. 정우의 새로운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디에 있든 간에 잘 살아내고 잘 버티고 있음에 기운이 차오르고 감사한 일이라고.

여유, 까르푸황, 정우
[키위피디아]에 걸맞은 선글라스를 쓰겠다며..
[키위피디아]에 걸맞은 형광조끼도 입었다.

오늘은 자랑하고픈 날이 되었다. 음악가로서 제주가 살아남기 힘든 땅이라고 자조하던 날들, 수많은 동료들과 견주며 도태되는 듯한 하루를 마주하는 일들. 조금씩 몸이 움츠려지는 삶에서 우리가 여기 제주에 있고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어 기뻤고, 친구들과 보러 와 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이 되었다.

까르푸황이 찍은 여유와 설빈
관객들은 이렇게 키위를 따갔다.
공연이 끝난 후 장비를 챙기는 CTRsound 식구들
오래 기억될 단체 사진
유튜브에 올라온 여유와 설빈 공연 영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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