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수학학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소나기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맞이한 비였지만 개의치 않고 걸었다. 한 어른이 딱한 얼굴로 '너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 피하지를 않냐'며 나무랐다. 비 맞는 게 좋아 피할 이유도 없었고 쫄딱 젖어도 마르겠거니 했지. 시간이 흐르고 나는 어엿한 수학포기자이자 비 소식이 싫은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그 어른처럼 비 맞는 이를 안쓰럽게 보는 눈도 생겼다.
집에 남, 사, 차 세 명이 들이닥쳤다.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셋이 거실에 나란히 이불을 깔고 자고 있다. 낮부터 있었는데 이틀 내리 술을 마시니 피곤해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황은 곤히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나는 솔로>를 숨죽여 보고 있었다. 요즘 우리는 연애 프로그램에 미쳐 있다. 여하튼 남, 사 둘은 안면이 있었고 차는 처음 보는데 잠에서 덜 깨 부스스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멋쩍은 웃음도.
원형 탁자에 다섯 명이 둘러앉아 스파클링 와인을 뜯었다. 세 명이 집 방문을 기념하며 사온 거다. 사는 운전을 해야 해서 안 마신다고 했다. 단호하지는 못했다. 말끝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니 그냥 마시고 자고 가라고 했다. 와인잔에 스파클링 와인을 따르며 얘기를 나누었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누구에게 감정이입이 되는지, 어떤 사람이 끌리는지. 그러다 차가 자신의 성적패티쉬를 얘기하며 액셀을 밟아서 한동안 난장이 펼쳐졌다.
사는 호주에 있는 동안 육류는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먹을 걸 통제하는 자신이 꽤 만족스러웠단다. 난 비건 요리가 좋지만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는 부담이 된다고 얘기했고, 남은 완전한 비건한 명보다 서툰 비건 지향인 열 명이 더 낫다고 말했다. 오프라인에서 이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신이 났다.
같이 먹을 비건 요리를 만들었다. 몇 년 숙성한 우메보시, 그저께 수확한 땡초, 슈퍼에서 산 당근이랑 김.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주먹밥을 만들었다. 두 종류로 만들었는데 하나는 우메보시, 매실청, 레몬즙, 다진 마늘, 참기름을 밥이랑 섞어 김을 둘렀고, 하나는 당근과 땡초를 생강청에 볶아서 밥이랑 섞고 데친 깻잎을 둘렀다. 엄마 집에서 가져온 글렌피딕도 뜯었다. 얼음을 넣으니 마실만 했다.
클라리넷 이야기를 하는데 차가 눈빛에 생기를 잃어 이유를 물었더니, 음악은 아무것도 모르겠고 재미없다고 했다. 그는 요즘의 재미를 이야기하다 자랑스럽게 노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귀농귀촌비밀일기모임'. 귀농귀촌한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뒷담도 적고 추억도 나누면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차는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눈이 초롱해졌다.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재미없음과 재미있음의 상태가 극명한 그의 모습이 좋았다. 이렇게 생생한 솔직함이 얼마만인가.
사는 서핑을 좋아한다며 조만간 서핑하러 간다고 한다. 세화 바다가 예쁘다고 해서 삼양 바다도 좋다고 얘기했다. 갈까? 갈래? 가자! 황의 차를 타고 검은모래해변으로 갔다. 평소라면 돗자리 깔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날씨가 궂어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수평선에 걸친 한치잡이 배들이 반짝이고 그쪽에서 오는 듯한 파도는 깜깜했다.
바다에 지체 없이 몸을 내던졌다. 남과 사는 수영 실력을 뽐냈다. 남은 최근에 접영 발차기를 배웠다면서 다리를 돌고래처럼 팔딱팔딱 움직였다. 사는 수중 아크로바틱을 하듯이 제자리 돌기를 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헤엄치고 떠다녔다. 누가 위험에 처하면 구해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똘똘 뭉쳐있자, 멀리 가지 말아라 외치면서.
비가 내렸다. 몸은 바다에 둥실 떠있고 물위로 내민 얼굴에 빗방울들이 토독 토독 내려앉았다. 반가웠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어떤 계획도 없이 오롯한 충동으로 바다에 도달하여 몸을 던지는 것이. 얼굴을 두드리는 비를 아무 계산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나누는 것이. 바닷물 먹고 허벅지까지 축 처져 무거운 티셔츠도 모래가 들러붙어 꺼끌거리는 발바닥도 모두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어떤 날과 통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