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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21. 2020

영화롭게 말걸기

영화 <한공주>



영화 <한공주>는 2004년 밀양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2014년 만들어진 영화다. 어떤 영화들은 보게 되기까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이 영화도 내겐 그런 하나였다. 봐야지 라는 마음과 아직은 보기 힘들겠다는 마음이 계속 부딪히다 간밤에 느즈막히 코스타리카 캡슐로 내린 진한 카페라떼가 불러들인 불면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사건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지역 사회에 고착된 어둡고 탁한 폐쇄성과 뿌리 깊은 은폐 습성, 미성년 피해자에게 가해진 어른들의 2차 3차 폭력과 피해자성(자격)의 요구까지 잔혹함으로 견고하게 뭉쳐진 사건이었다. 밀양 연합이라 불리우는 고교생 일진 집단 44명이 여중생을 꾀어 무려 10여개월간 지속적으로 윤간하고 금품까지 갈취했음에도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고 밀양의 이미지가 흐려질까 지역 교육감들이 나서 사건을 서둘러 덮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경찰은 피해자 보호에 소홀해 가해자의 가족들은 피해자를 둘러싸고 협박을 하기에 이른다. 피해자의 아버지란 작자는 알콜중독이었는데 미성년 피해자의 법정대리인이었던 그 아비와 친족들은 가해자 측으로부터 합의금조로 돈을 받아 챙겨 결국 가해자들은 기소 불능이 된다. 그 돈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비와 친족들이 개인적으로 나누어 착복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피해자의 친모는 가출 상태였다. 또한 피해자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겠다 약속한 경찰은 말을 바꿔 언론에 이를 노출했고 더 끔찍한 건 피해자를 촬영한 동영상이 미국, 일본 등으로 '엽기' 라는 제목을 달고 유출 되어 돌아다닌다는 사실이다. 이 영상엔 피해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의 플롯도 실제 사건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열일곱살 여고생 한공주는 부모가 부재한 집에서 고단하게 살아간다. 밤을 새워가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른이 없는 공주의 집은 어느덧 일진의 아지트가 된다. 그 과정에서 공주와 그녀의 절친은 공주의 집에서 일진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공주의 절친은 투신 자살을 한다. 공주는 담임의 도움으로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고 구원처럼 붙들고 있던 음악 덕분에 새 친구들과도 사귀며 점점 상처를 치유하는듯 보였으나 친부, 친모, 경찰, 가해자의 가족들은 공주의 삶을 다시 엉망으로 만들고 새 친구들마저 공주의 과거 사건을 알게 되면서 공주를 외면하기에 이른다. 결국 공주는 그 도시를 떠나 한강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자기 소유의 집을 장만하려 애쓰는데 그건 집이 내가 언제든 돌아와도 되는 곳, 나를 무엇으로부터든 보호해 주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 열일곱살의 공주에겐 집이 없다. 집이라 믿었던 곳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집을 빼앗긴 공주에겐 돌아와도 되는 곳이 사라진다. 어른과 사회는 공주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며 공주가 지닌 참신한 음악적 재능은 새 친구들을 만나게는 해주었으나 공주 인생의 보호막도 방호벽도 되주지 못한다. 죽고싶어 물에 몸을 던진 후에 혹시라도 살고 싶어질까봐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영화 끝, 작은 짐가방을 한강 대교 어디쯤 세워두고 투신한 공주는 물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혹은 무자비하게 자신을 두들겨패고 도망치게 만든  사회라는 괴물로 부터 벗어나 비로소 안식처를 얻었다 여겼을까?

영화엔 고장난 벽결이 선풍기가 등장한다. 공주에게 일어난 생의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벽걸이 선풍기의 시선과 시점으로 보여진다. 회전 기능이 망가진 선풍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사건을 고스란히 바라보지만 공주를 보호하진 않는다. 가해자들의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폭력 속에서 아무리 울고 소리를 질러도 선풍기는 공주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외려 폭력적인 가해자들에게 시원함이란 배려를 베푼다. 고장난 선풍기는 사회에서 약자를 보호해야할 어른을 상징함에 다름 아니다. 집(사회)도 선풍기(어른)도 모두 강자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공주는 내 집의 형광등 하나도 어쩌지 못한다. 공주 집의 깜박거리는 형광등이 가해자들의 손으로 교체된 순간, 지금껏 집을 빌려주었던 공주의 배려는 이제 가해자들의 권리로 전복된다. 가해자들은 마음껏 공주를 유린할 자격(?)을 거머쥐었고 공주는 피해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어느덧 사과를 받아햐 하는 쪽이 도망을 가는 지경에 이른다. 도망치는 쪽은 마침내 막다른 곳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공주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쫓아오는 자들의 세계에서 공주는 집도 선풍기도 가지지 못하며 누구도 내 편이 아니다. 그 너머의 세계에 나를 던질 수 밖에.  

밀양 사건 이후로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밀양 사건의 피해자는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수많은 몸과 마음의 병을 지닌채 겨우 살아가는 중이다. 이 사건의 전모가 알려진 지금도 당시의 가해자들은 평범한 일상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n번방 사건과 같은 더 엽기적으로 진화한 범죄가 연이어 발생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일이 지극히 나이브하고 해맑은 태도처럼 여겨져 유리창에 입김을 입힌 듯 마음이 금새 흐려진다.

창문에 입김을 쏘이면 뿌옇게 흐려진다. 때론 그 곳에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써보기도 한다. 하트와 이름은 금새 희미해진다. 또 입김을 쏘이면 유리가 흐려져 다시 하트와 이름을 쓸 수 있게 된다. 비록 그 흔적이 또다시 사라져 버릴 지라도. 사회에 속한 개인 하나하나가 각성과 반성을 통해 희망을 거듭해 입에 담는 건 어쩌면 이런 일과 같지 않을까. 흐려지고 희미해 질지라도 입김을 쏘이고 그 위에 무언가를 줄곧 써내려가는 동안 유리가 조금이라도 맑아져 투명해질 수 있다, 고 믿는 일 말이다. 그 변화의 속도가 아무리 미미할 지라도.

한공주가 뛰어든 강물 속에서 그래도 살고싶어졌기를 바란다. 열심히 배운 수영으로 힘차게 팔다리를 휘저어 음파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헤엄쳐 25미터 정도는 나아갔기를. 그리고 그 곳에 부디 붙잡아 숨을 고르고 지친 몸을 가눌만한 실내 수영장의 레인같은 줄이 있기를. 마침내 물 속에서 나와 뚜벅뚜벅 세상을 향해 걸어가게 되기를. 부디 애정하는 기타를 몸에 걸고 내 목소리로  노래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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