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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Aug 17. 2022

레비나의 짧은 소설

라이언과 유나


오늘 라이언의 대화 상대는 민트 컬러에 보라빛 줄무늬가 지그재그로 그어진 홀터넥 모노키니를 입은 제니퍼다. 씨필즈 어학원의 신입생 제니퍼. 라이언에게는 씨필즈 신입생 킬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제니퍼 전에는 짙은 브라운 컬러의 비키니를 입은 케이트였다. 케이트는 지난 토요일 4주간의 어학 연수를 마치고 한국의 지영으로 돌아갔다. 막탄 공항에서 펑펑 울었다던가. 세기의 연인들 나셨네. 한심해. 이건 마음의 소리. 이런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걸까? 라이언과 내 시선이 충돌한다.


씨필즈는 폐업한 세부시티의 한 호텔을 한국 에이전트가 매입해 어학 연수용 기숙사 학원으로 개조한 곳으로, 건물 뒤에 호텔이던 시절부터 쓰던 아담한 야외 수영장이 있어 이 시간 즈음엔 수영복 차림의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수영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캐나다나 미국, 영국 유학 전 영어를 다지려 들어온 대학생들이 대부분 이었고 회사를 다니다 사표를 던지고 온 삼십대는 내가 유일했다.


똑똑.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누군가 두드린다. 하얀색 피케 티셔츠와 네이비 블루의 볼캡, 베이지색 버뮤다 팬츠에 슬리퍼 차림의 라이언. 고개도 들지 않고 눈만 슬쩍 슬쩍 치켜 떴다. 내게 무슨 용건이라도? 내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라이언의 얼굴은 악의라곤 눈곱 만큼도 보이지 않았고 세상 무해했다.


담배 있어요?


테이블 한쪽에 둔 말보로 라이트 상자와 라이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 보이니? 그때의 내 눈은 그런 뜻. 라이언은 상자에서 담배 하날 꺼내 불을 붙인다. 하얀 연기, 까만 밤, 파란 풀, 그리고 라이언. 그가 내 앞자리에 걸터 앉는다. 읽던 책을 덮고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내 방으로 돌아가려 일어선 순간이다.


좀 더 있지 그래요?


하얀 연기, 까만 밤, 파란 풀, 그리고 라이언. 라이언 등 뒤로 제니퍼가 우리 쪽을 지켜보고 있다. 쭉 뻗은 종아리가 아주 예뻤다. 조명으로 푸르게 일렁이는 풀장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어 꼭 여신 같았다.


하얀 연기, 까만 밤, 파란 풀, 라이언, 제니퍼, 그리고 나. 내 이름은 유나. 영어 이름도 한글 이름도 똑같이 유나. 한국은 가을이 시작되고 있겠지. 여름 나라에 사는 건 시간이 멈춘 곳으로 떨어진 기분. 라이언과 유나, 하얀 연기, 까만 밤, 파란 풀. 제니퍼는 이미 없다.


내일은 새로운 신입생들이 오는 날이다. 어떤 영어 이름이 등장할까. 내 이름은 유나. 영어 이름도 한글 이름도 똑같이 유나. 라이언과 유나. 밤이 깊어간다. 풀 사이드 조명이 꺼진다. 제니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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