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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Aug 19. 2022

레비나의 짧은 소설

석양의 미덕


희록은 석양에 꽤나 몰두하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은 고층 건물이라 시간 맞춰 옥상에 오르면 노을이 도시를 덮치는 굉장한 장면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아무리 담고 또 담아도 노을은 전혀 질리지 않았다. 늘 새롭게 신기했다. 그랬던 그녀가 요샌 시큰둥하다. 그렇다고 석양빛에 감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노을을 우연히 발견한 순간엔 여전히 마음이 차올라 미간이 물든다. 그 뜨거움, 그 눈부심, 그 그리움, 그런 것들로 인해 패이는 주름은 한층 짙다. 하지만 희록은 더 이상 석양 시(時)를 공들여 기다리지 않는다. 그 멋진 장면은 그녀가 발견한 벅찬 순간이긴 하지만 모두의 것인 동시에 그녀만을 위한 현상은 아니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 공평이란 차가운 미덕이라고. 노을빛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석양의 미덕은 공평해서 냉정하다는 것을. 공평과 당연은 다른 듯 닮았다.


정주와 처음 만난 날 희록은 그의 아파트 거실 바닥에서 섹스를 했다. 한 번은 제대로 했고 두 번째는 하다 말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기묘한 밤이었다. 방이 세 개나 있는 아파트였는데 어째서 소파도 아닌 바닥에서 그랬을까. 카페트가 깔린 것도 아닌 데다가 심지어 오디오 선반 아래엔 이미 쓴 콘돔이 바짝 말라 굴러 다니고 있었다.


약간 따분하지만 그럭저럭 우호적이고 꽤 평화로운 관계였다. 그는 이런저런 여자들을 찾아 헤매다 얽히고 싶은 상대가 마땅히 없으면 희록에게 문자를 보내는 거 같았다. 엄밀하게 '같았다'는 아니다. 정주는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요새 괜찮은 여자가 없다고. 아무리 봐도 니가 제일 낫다고. 그녀는 그의 문자에 반쯤은 바로 회신을 보냈지만, 나머지 반의 반쯤은 일부러 다음날 문자를 보내며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그리고 나머지 반의 반은 읽씹을 했다. 읽고도 모른 체한다는 뜻을 가진 '읽씹'이야말로 둘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는 단어 같기도 하다. 정주는 어떨지 몰라도 그녀는 다만 당연하지 않으려 애쓸 따름이었다. 그것이 공평한 관계라 믿었다.


시간의 축적은 꽤나 힘이 있어서, 혹은 적당과 무의미함 사이의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라 그랬는지, 둘은 제법 오랜 세월을 끈끈하게 보냈다. 그렇다고 희록이 정주를 만나 섹스만 한 건 아니다. 그저 가만히 말줄임표 같은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는 적도 있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희록은 직업을 세 번 바꾸었고 남친이라 부르는 사람이 1.5명 있었다. 0.5명은 뭐냐면, 남친이라 인정한 지 두 달 만에 그 새끼가 연락을 두절했기 때문이다. 1년쯤 지나 새벽 1시 23분에 자니? 라는 문자를 보내왔길래, 아니 지금 남친이랑 섹스 중이야, 라고 회신을 보냈더니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사실 그때 희록은 혼자였다. 자니? 에서 물음표 정도를 맡고 있었다.


정주는 희록에게 뜬금없는 선물을 보내오곤 했다. 한약을 수입하는 사람이 손수 만들었다는 쌍화차 티백, 비즈가 화사하게 박힌 블랙 체리향 디퓨져, 백화점 상품권, 마카롱 12개 세트, 독일제 연필 깎기 같은 것들을.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아닌, 맥락 없는 그 선물들이 어쩐지 기뻤다고 희록은 기억한다. 하지만 그 물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라면 상자에 담아 옷장 한편에 두고 가끔 꺼내 흡흡 냄새를 맡아보거나 손으로 쓰다듬었다. 뭐랄까, 그걸 실제로 사용하면 그와 그녀의 관계에 이름을 붙여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맞춤한 이름을 찾아낼 거란 생각은 도무지 안 들었다. 그럼 다시 라면 상자에 그것들을 쓸어 담고서 옷장에 가두었다.


희록은 정주와 만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일이 없다. 그래야 한다고 정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오래전, 둘이 종종 가던 정주의 단골 술집에 희록이 딴 남자를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다른 일행, 즉 여자를 데리고 온 정주를 만났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서로를 향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 정주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질문을 했을 뿐이다. 걔 잘했냐? 별로 못 할 거 같이 생겼던데. 아, 그 남자? 제법 쓸만했어. 뭐,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물론 그건 거짓말이다. 그날 희록과 동행했던 남자는 그녀와 그 밤을 보낼 거라 기대했음에 틀림이 없지만 그녀는 그 술집에서 정주와 우연히 마주친 순간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정주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석 달 째다. 건너 건너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별 일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희록은 그와 가던 그의 단골 술집에 혼자 갔다. 술집 주인이 그녀를 보고 반색을 한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냐고. 희록은 정주도 요즘 이곳에 오지 않나요? 하고 물으려다 만다. 답을 알 것만 같아서. 예상했던 답을 들어도, 예상하지 않은 답을 들어도, 기분은 꼬깃꼬깃을 향해 이미 내달리고 있다.


후 다시 간 그 술집은 간판이 사라지고 없었다. 우연을 기대할 장소마저 사라진 셈인가. 좀 더 자주 들러볼 걸 그랬나. 정주의 연락처는 똑같을 테지만 연락처가 지워진 사람처럼 희록은 폰 주소록에서 그의 이름을 소환할 수가 없다. 그의 SNS 계정을 찾아 들어가 본다. 그는 여전하다. 희록과 아파트 바닥에서 섹스를 했던 그날의 정주와 다를 바 없는.


희록이 아닌 다른 여자완 바닥이 아닌 침대나 소파에서 할까. 언젠가 희록도 새벽 1시 23분에 정주에게 연락을 하게 될지 모른다. 자니? 주소록에서 정주라 쓰인 항목을 찾는다. 삭제 버튼 위에서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같은 극끼리 만난 자석처럼 서성인다. 마침 석양, 온통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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