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중파라면 E는 즉흥파다. 내가 요리 젬병이라면 E는 요리 마스터다. 내가 짬뽕이라면 E는 크림 파스타, 내가 공원 취향이라면 E는 클럽 취향…… E와 나는 이렇게나 다르다. 같은 과 동기가 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친구가 되지 못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접점이 하나도 없다. 애초에 만나는 것부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E와 나에게 공통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제외한 공통점이 딱 하나 있다. 우리는 전공을 여러 번 바꾸다 늦은 나이에 신입생이 되었다. ‘나이 많은 신입생은 뻘쭘한데.’ 생각하는데, 동갑인 친구가 있었다. 나는 E에게 E만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 무렵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공부한 분야가 없다는 점이 고민이었다. 문학도 좋고 물리학도 좋고 심리학도 좋았다. 직전 전공은 중국어였다. “여기저기 발만 걸쳐놨어. 이대로 아무것도 못되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내가 묻자 E는 말했다. “나는 체교과에서 수학과 거쳐서 문창과 왔는데 뭘.”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라, 그런가?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태연한 얼굴에 고민이 싹 사라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괜찮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는 E와 연애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소개팅이 좋으니 싫으니 하는 이야기 중이었다. 이번에도 의견이 갈렸다. E는 소개팅 ‘좋아’론자, 나는 소개팅 ‘싫어’론자였다. 뜻밖에도 이유는 같았다. 상대를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한다는 것.
E가 말했다.
“모든 건 첫눈에 결정돼. 처음 봤을 때 아니면 아닌 거야.”
내가 말했다.
“어떻게 첫눈에 결정이 돼?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잖아.”
말하자면 E는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을 보는 순간 연인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 단번에 느껴진다고 했다. 기준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미간을 좁혀 고민했다. 그런 느낌이 있는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공통점은 있어.”
“어떤 공통점?”
“키가 크고 말랐어. 고양이상에…… 좀 모델 같은 느낌.”
“그건 그냥 취향 아니야? 이상형이나.”
나는 공감이 되지 않았다. 이상형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내 이상형은 누적된 과거의 산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형이 된 케이스였다. 애초에 이상형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랑 연애를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난 내 이상형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던데.
“그럼 전혀 취향이 아닌 사람이랑도 연애할 수 있다고?”
“막 비호감에 너무 싫다 수준만 아니면. 가깝게 지내다가 정들어서 좋아지는 경우도 많지 않나? 아니다, 난 그 경우밖에 없었어.”
E가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이해가 안 가기로는 피차 마찬가지인 듯했다. 잘은 몰라도 앞마당에 심긴 나무를 매일 보다 정 들어서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 아닐까. (E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극단적인 망상이 필요했다.)
“야, 그럼 너 나도 좋아할 수 있어?”
E가 물었다. 허튼 수작 아니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저 인간만큼은 평생 혐오할 거’라 생각한 사람에게조차 아주 조금(강조) 호감을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함부로 하고, 행동 거칠고, 지 잘난 맛에 사는, 무식한 인간. 그게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의외의 다정한 면모를 목격한 뒤 나는 그 사람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다 깜짝 놀랐다. 그날 본 인성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기억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탈덕(?)했다.
그러니까,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E가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의외의 다정한 면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어떤 순간이 내게 주어질지도 몰랐다.
“음, 아니.”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능성에 대한 생각으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E의 취향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 그럴 수 있겠다 말한다면, 좋아한 적도 없는데 차인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경험 있다. 너무 열받아서 뒷일 생각 안 하고 번호까지 차단해버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꼈던 순간들은 논리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한번은 학교 선배가 브이넥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꼈고, 또 한번은 직장 동료가 내 앞에 달걀 프라이를 놓아주는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나는 브이넥 성애자나 달걀 프라이 성애자가 아니다. 이미 정이 붙고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우연히’ 브이넥 티셔츠와 술잔이 기폭제가 됐을 것이다. 반하는 순간이 언제냐는 E의 질문에 나 역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느낌이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E도 이런 마음이었으려나. E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