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리다
동사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
1. 동사 연필, 붓 따위로 어떤 사물의 모양을 그와 닮게 선이나 색으로 나타내다.
2. 동사 생각, 현상 따위를 말이나 글, 음악 등으로 나타내다.
3. 동사 어떤 모양을 일정하게 나타내거나 어떤 표정을 짓다.
5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졌다.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갈수록 감정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고,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만 선명해졌다. 하루하루 마음을 정돈하는 시간이 늘었다. 결국 끝을 봤을 땐 슬픔보다 허무함이 더 컸다. 허전했지만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때쯤 이미 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매일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함이라는 단어는 뻔하다. 여러 번 떠올려볼 필요도, 입안에서 굴려볼 필요도 없다. 나는 5년을 지나 보내며 그와의 대화를 매일같이 돌려보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레 연락이 늦어져도 또 잠을 자고 있겠구나, 짐작하게 됐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안정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하루하루 내 마음을 깎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에게서 닷새째 연락이 없던 날, 그러니까 나조차도 닷새 간 연락하지 않았던 날, 나는 비로소 기다리고 대비해 왔던 끝이 왔음을 직감했다. 내가 먼저 끝을 내야 한다고 깨달았다. 내가 이별을 선언하자 그는 미안해 할 필요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금 후련하고 많이 억울했다. 내가 닷새 간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걸 너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단단히 먹은 덕인지 헤어짐이 아주 슬프지는 않았다. 첫 이별도 아니니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것도 알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미 오래 전 잃어버린 습관이 되돌아왔다. 나는 자꾸만 그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저녁이 되면 꼬박 전화를 걸었다. 웃을 땐 어쩐지 부끄러운 기색이 어렸고, 선물을 받을 땐 그 크기가 얼마 만하든 꼭 갚아 주고 싶어했다. 조금만 칭찬해도 더 칭찬 받고 싶어 과장해서 장난을 치곤 했다.
나는 그의 다정함을 사랑했고, 그는 나의 세심함을 사랑한다 말했다. 다정함과 세심함의 온도가 같아 늘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그 편안함을 매일같이 들여다봤다. 그저 들여다보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마음과 함께 그 기억들을 깎아내야만 했다. 연필을 깎고 남은 부스러기를 치우듯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표정과 습관 들을 치워버려야 편안해졌다. 익숙한 것들은 구태여 떠올려 봐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특별히 그립지는 않다. 하지만 종종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부끄러운 듯 웃을 때 입 모양이 어떻게 변했더라. 모든 것이 꽁꽁 언 그 겨울날 손의 온도는 어땠었지. 구체적으로 떠올릴수록 낯설어진다. 더 이상 익숙한 광경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그립지 않다고 말하며 그의 모습을 그려 본다. 왜 하필 그리는 것도, 그리는 것도 ‘그리다’여서는. 결국 나는 내가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