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들어서다.
나는 더 이상 내 안에 빠지지 않습니다.
나는 매일, 매분, 매 순간 '나'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타인지, 자기 객관화, 명상적 자각 상태 —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삶의 기본 상태가 되었네요.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늘 지금의 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빠지거나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내 선택을 바라봅니다.
예전처럼 매일 술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택을 무시하거나 후회하며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선택의 순간과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받아들이는 것보다 — ‘그것은 늘 나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매일 술을 마신다면,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가족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으며,
삶의 질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고,
그 결과들을 멀리서 자각하며 바라봅니다.
나는 자각하고 있기에,
나의 선택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과한 음주로 삶이 무너지는 지점까지
내가 나를 몰아붙이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매 순간 ‘의식적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매 순간 나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 중심’의 삶입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회고나 반성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가깝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매 순간 나를 의식하고 산다는 건 너무 피곤하고 귀찮은 일 아닌가?”
“자꾸 나를 돌아보는 건 에너지의 낭비고, 비효율적이지 않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 중심의 삶은,
말 그대로 ‘계속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걸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를 자각한다’ = ‘깨어 있다’
이 둘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깨어 있는 것,
매 순간 나를 자각하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상태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를 자각하지 못한 채, 무언가에 빠져 버리게 되면
‘나’를 잃어버린 내 의식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황장애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은
사실 우리의 사고와 인식이 무한하기에 무한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한한 인식의 흐름 속에서
내가 어디엔가 빠져,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나의 무한한 의식과 ‘나’라는 내가 보는 삶이 일치하지 못합니다.
나의 무한한 의식의 본래 상태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은 서로 다르게 되는 거지요.
그 차이 때문에 나는 고통을 느끼며 삶 속에서 헤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곧 고통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나’를 자각하는 것이,
나의 본래 상태와 지금의 나를 무한히 일치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존재’를 이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무한한 인식 능력은 축복이지만,
그 중심에 ‘나’가 없으면,
그 무한함은 곧 혼란이 되고, 고통이 됩니다.
‘나’를 자각한 상태에서는
의식의 흐름이 하나의 강물처럼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반대로 우리가 빠져 있을 때는
그 흐름이 지그재그로 튀고 부딪히며,
의식에 불필요한 부하를 만들어냅니다.
그건 고통이며,
삶의 ‘부드러운 연결감’을 잃게 만들지요.
매 순간 깨어 있는 순간이 곧 고통을 없애고,
온전한 나의 상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걱정과 고민이 생길 자리가 없습니다.
무한한 이 순간에 연결되어
관찰자로, 여행자로, 나로서
겸허히 이 순간에 머물 뿐입니다.
또 빠질 수밖에 없는 나도 그대로 나로
묵묵히 수용하며, 바라봐 줍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 중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