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라는 뿌리로 뻗어나가는 가지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내가 하는 생각, 운동, 학습, 사랑이라는 것들 이런 단어의 본질도 결국 ‘내가’ 하는 것이란 본질에서 비롯되죠.
형태와 정의는 다르지만 내가, 그리고 사람이 한다는 점은 같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단어도 불리는 단어만 다를 뿐 그 속 안의 뿌리와 본질은 같다고 봅니다.
자기 객관화 = 메타인지 = 객관적 = 고요함 = 여유 = 텅 빔 = 무아 = 깊은 사고 = 편견 없음 = 비움 = 중도 = 중립 등의 단어이죠.
모든 인간은 객관적이고 싶습니다. 객관적이려 하는 것은 단순한 기호나 선호가 아닌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세계, 즉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의견이 같다고 해도 그 세부 사항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과 의견, 그리고 근거와 논리가 무한하기에 오직 나만의 나의 ‘생각’이라는 ‘해석’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그 마음을 알 수 있죠.
그걸 우리는 알고 있기에 우리는 ‘고립’되어 있음을 압니다. 서로서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죠. 더하여 내 마음조차도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객관’은 내가 이 세상이라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요건임을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객관적이고 싶지만 그 객관을 막는 것은 우리의 ‘패턴’들입니다.
인간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내려주는 역할, 즉 내 삶의 해석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도파민’입니다.
좋든 싫든 어떤 예상과 기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쌓아 온 기억과 습관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하게 만들어 줍니다.
결국 어떠한 고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도파민’의 역할입니다.
고착이란 결핍이라 부를 수도 있고, 고정되고 유한한 정해진 것을 만들어 냅니다.
매일 아침에 러닝을 해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러닝을 하고 기분도 상쾌하고 소화도 잘되고 여러 가지 장점을 느끼며 이것이 ‘맞다’라고 유한하고 고착화된 루프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습관, 정체성, 가치관, 신념 등으로 부르기도 하죠.
세상에 좋은 습관도 나쁜 습관도 없습니다. 모든 습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습관에 빠질 뿐이죠.
매일 아침 30분씩 러닝하는 습관에 고착된다면 우리는 그 습관에 빠질 뿐입니다.
더 나은 운동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하루, 한 주, 한 달을 쉬는 것이 더 나에게 이로울 수도 있으며 결국 그것이 나와 가족 관계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우리의 해석일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 해석을 돌아봐야 할 뿐입니다.
음주의 습관, 숏폼 시청과 같은 오래되고 강력한 자극일수록 우리의 ‘객관’을 막게 됩니다.
하나, 두 개의 작고 큰 습관이라는 ‘고착’은 우리의 뇌의 유연한 연결을 막고 이 순간을 풍부하고 무한하게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기존 세상을 허물고 하나의 습관이라는 결핍을 이해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갑자기 방을 정리하게 되는 것은, 평소 고착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보이지 않게 고착되어 있고 또 보이지 않게 유연하고 객관적이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객관적일수록 더 비우고 더 고요하며 더 여유 있게 이 순간에 머물게 되죠.
객관이란 그런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객관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이며 ‘해탈’이자 비움의 길이죠.
그만큼 어렵고 또 본질적이며 인간의 원초적인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생명체로 존재하기에 가장 잘, 무한히 깊이 존재할 수 있는 것, 바로 ‘객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