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먹고 살 만하다.
먹고 살기 힘들 땐 우리는 ‘생존’이라는 존재함에 집중했다.
소주 한 병, 담배 한 갑도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생존’에 위협이 된다면 ‘중독은 사치에 불과했다.’
중독될 수 없는 환경이었고, 중독되려 들어가려 해도 그만큼의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패턴이 완성되기에 우리는 오직 ‘존재함’에 집중했다.
‘존재함’에 집중한다는 것이 ‘존재의 의미’ 같은 깨달음을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살아 있음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탐욕과 욕심이 과하지 않았고, 멀리 또 많이 볼 수 없었기에 존재 그대로 의미 있었을 것이다.
이젠 먹고 살 만하다.
바쁘다 말하지만 먹고 살 만큼은 벌고 시간도 어느 정도 있다. 다만 우리의 기대와 탐욕이 날 옥죌 뿐이다.
너무 풍요롭고 많고 넓기에 넘치게 비교하고 밖만 바라볼 뿐이다.
먹고 살 만한 우리의 삶에 ‘존재’ 그리고 ‘의미’는 없다.
‘살아 있음’을 돌아보기보단 살아 있는 건 당연하기에 밖을 보며 자극을 찾는다.
먹고 살 만하기에 우리의 일상에 술, 영상, 음식 등의 자극을 넣고 무감각한 채로 살아간다.
‘고통’을 피하려 한다. ‘행복’도 피하려 한다.
고통은 아프고 행복은 곧 지나가기에 사치가 되고, 곧 공허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무뎌도 너무 무뎌진 채 삶의 의미 따위 없는 채로 따뜻한 방에 따뜻한 밥을 먹으며 따뜻하게 자고 일어나 오늘도 반복된 삶을 살 뿐이다.
반복을 끊어내기엔 너무 오랫동안 ‘나의 의미’를 멀리했다.
자꾸만 경쟁 속에 나를 밀어 넣으며 부모님이, 자식이, 친구라는 타인들이 보인다.
사회에서 멀어지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당신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무감각한지, 그리고 의미 없이 무기력한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쫓는지, 왜 오늘 일을 하는지, 왜 술을 먹는지 모른다.
당신은 지금의 당신의 삶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