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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Aug 07. 2023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아픈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수술 전 고통은 기분 나쁘게 미세한 칼로 등 전체를 베는 고통이었다면… 이건 그냥 너무 아파.”

“이 수술이 이렇게 아픈 거라고? 수술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수술을 한 것이 잘한 것일까?”


수술 전 권교수님은 남편의 극심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두 가지 안을 제시했었다.

첫 번째 방법은 외과수술로 3번 척추에서 자라난 신경을 누르고 있는 암덩어리를 직접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후 척추가 무너지지 않도록 근처의 뼈들을 철심으로 연결해 강도를 보강하는 방법이었다.

위험요인을 즉각적으로 제거할 수 있고, 가장 큰 장점은 수술 후 2~3일이면 식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긴 투병 생활을 하는 암환자에게 한번 꺾인 몸 상태는 항암을 거치며 점점 더 나빠진다고 유튜브 의학 채널에서 봤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항암조차 받지 못하고,  결국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수술의 단점은 고통스럽고, 회복기간이 필요해서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가 2주 정도 미뤄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방사선치료방법으로 수술의 고통은 없지만, 신경을 누르는 암이 언제 얼마나 제거될지 기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이대로 누워서 지내야 할지 식사는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물음표였다. 반면에 장점으로는 언제든지 항암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암이 급속도로 번지는 상황에서 항암시기를 2주간 미룰 것인지, 지금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의 고통을 견딜 것인지, 언제까지 식사를 하지 않고 영양제로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수많은 변수 중 어느 것 하나 경험해 본 것이 없었고, 주위에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없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매 순간마다 생명을 담보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권교수님 역시 주위 동료 교수님들에게 물어봤지만 반반의 대답이 돌아왔다고 하셨다.

결정은 우리가 해야 했다.

막 운전면허증을 받은 초보운전자가 강남역 한복판을 운전해야 하는 격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때?”

“이미 답은 정해진 것 아니야? 빨리 끝내는 방향으로 해야지.”

“방사선으로 암이 제거된다 해도 뼈의 강도가 좋아져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잖아?”

“밥을 먹어야 항암을 버틸 몸 상태가 되는 거니까.”

다행히 남편과 나의 생각은 같았다.

위험요인을 빠르고 완벽하게 제거 후 식사를 통해 체력을 키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 집안에는 공격수 두 명이 산다.


수술 후 남편은 불안해했다.

고통이 참기 힘들다는 것보다 예상치 못한 고통의 이유가 혹시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다.

남편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 뒤척이다 진통제를 맞고 겨우 잠이 들었다.

밤 11시 또다시 익숙한 슬리퍼 소리가 입체 서라운드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하얀 거탑 BGM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설상호 환자분. 1인실로 옮기셨네요?”

정형외과 주치의 김교수님이 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몸이 마치 유도선수를 연상시켰다.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은 왜소해 보였는데, 실물이 훨씬 카리스마 있고 믿음직스럽다.

홈페이지 사진을 다시 찍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컨디션은 어떠세요?”

“사실 너무 아파요. 원래 이렇게 아픈 게 맞나요?”

“수술하기 전 영상에서 척추뼈를 침범한 암세포가 많이 보여서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수술 전 보호자 분에게 5개의 척추뼈를 연결할 수도, 7개를 연결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었죠?”

“막상 수술을 시작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뼈 상태가 무르지 않았어요.”

“5개로 연결했고, 근처 보이는 종양도 제거했습니다.”

“수술 직후 찍은 엑스레이를 확인해 봤는데, 수술은 잘 됐습니다.”

“수술하신 다른 환자분들 말로는 수술 후 3일간은 많이 힘들지만, 4일째부터 고통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하니까 조금만 견뎌보시죠.”


김교수님은 남편의 다리를 번갈아가며 위아래로 접었다 폈다 했다.

“아프신가요?”

“어? 괜찮은 것 같아요.”

“3일 이후부터 워커에 기대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걸으셔도 됩니다.”

남편은 선생님의 얘기처럼 수술 후 4일째가 되자 고통이 확 줄었다.


처음 응급병동에서 암병동으로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병실을 개인이 지정할 수 있는지 몰랐다.

수술 전 큰 형님은 나에게 얘기했었다.

“수술하고 나면 많이 힘들 테니 2인실이나 1인실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돈 걱정 때문에 6인실에 있지 말고. 가족끼리 돈을 좀 모았으니 병실료는 걱정하지 말아요.”

“… 엇? 병실을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건가요?”

“…… “

원하는 병실이 있으면 예약을 걸 수가 있다는 것을.

이런 무지함은 남편과 나 둘 다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1인실에 들어오자마자 4인실을 예약했고, 다행히 3일 후 자리가 나서 옮길 수 있었다.

복도 쪽 구석 자리였고, 커튼을 치면 빛 한점 들어오지 않았지만, 6인실에 비하면 지낼만했다.

화장실도 안에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병실을 선택할 생각을 못한 나 자신이 이해가지 않는다.

6인실에는 화장실이 안에 없어서 복도에 있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했어야 했는데, 다른 병실도 전부 화장실이 내부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회사생활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바보 같다.

답답한 마음에 지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병원에서 알아서 선택권을 제시해 줄거라 생각했어. 비행기 티켓 구매 하듯이 남는 좌석이 표시되고 입원 순서대로 물어봐 줄지 알았지.”


“하아.”


지현이는 늦둥이로 지현이의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보다 15살 정도 연세가 많으시다.

우리보다 15년은 더 경험이 많은 어른 같았고,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23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비서실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님께서 암에 걸리셨다.

“우리 아빠 암 이래.”

늦은 저녁 걸려온 지현이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나온 말이었다.

나는 뭔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지현이와 지현이 오빠는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효심이 대단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퇴근은 병원으로 했다.

암은 다행히 완치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에 걸리셨고, 치매로 고생하시다 지난겨울에 돌아가셨다.


“내 말 이것만 기억해.”

“병원에서는 우는 놈한테 젖 준다.”

“너 말고도 병원이라는 곳은 간절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의료진은 부족하고 정신없이 바쁘다고.”

“그러니까 뭔가 알아서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말할까 말까 고민하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계속 얘기를 해야 해.”


트리플 내향형인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 거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회화되면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그 방법은 병원을 회사라고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업무이고, 무조건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생각을 세팅하자 생각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행동 매뉴얼을 만들고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병실을 옮길 때 어느 자리가 명당인지 파악하고, 이미 그 자리에 누군가 있다면 퇴원할 날짜를 체크하고, 적정한 시기에 미리 간호사에게 요청을 했다.

모든 일이 매끄럽게 진행됐다.


우리는 어느새 4인실 통창 명당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아침엔 녹색의 공원 너머 이마트와 아파트 단지가 보였고, 에어컨 앞이라 원하는 온도로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 후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일어나기’ 도전을 하기로 했다.

‘일어나기’를 도전하기 전 공간 세팅을 먼저 해야 했다.

워커를 침대에 붙여야 하는데, 공간이 좁아 주변을 먼저 정리해야 했다.

먼저 내가 사용하던 보호자 침대 위 업무를 보던 노트북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침대를 들어 벽에 붙인다.

철제다리로 무거워 잘 못 들면 허리를 다칠 수 있다.

이럴 때 작년에 받아 둔 개인 PT가 빛을 발했는데 엉덩이와 다리의 힘으로 안전하게 침대를 들었다.

소변 백을 잠근 후 수술부위의 피가 모아지는 두 개의 석션포트와 함께 비닐봉지에 넣었다.

남편 침대의 안전바를 내리고, 워커를 가져와 남편의 다리 맡에 고정시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편에게 목 보호대를 착용시키고, 그다음 몸통 보조기를 해야 하는데 누운상태의 남편 무게를 견디며 끼워 넣어야 했다. 피부가 꼬집히거나 옷에 걸리면 안 된다.

모든 것이 빈틈없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아직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편을 침대 끝으로 이동시킨 후 천천히 침대를 올려 내가 남편을 일으킬 수 있는 높이를 만든 후 남편 상체를 껴안아 일으켰다.

마치 탱고를 추는 연인처럼 격렬하게 끌어안아야 했다.


침대에서 상체가 떨어진 것이  15일 만이다.

남편은 심호흡을 하고 워커 위에 팔꿈치를 올린 후 두 손으로 단단히 워커를 잡았다.

“후우”

끄응 소리를 내며 팔 힘을 이용해 일어났다.

바들바들 다리에서 시작된 떨림은 곧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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