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설상호 환자분. 웬일이에요. 일어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키가 크셨구나. 내가 다 감동이에요.”
“보호자분 얼른 사진 찍으세요. 이 역사적인 순간을 남겨야지요.”
상호 씨가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제일 먼저 달려와 준 단발머리 간호사였다.
일어나는 순서에 집중하느라 미쳐 생각을 못했다.
카메라 앱을 켠 후 남편의 몸 전체가 나오도록 휴대폰을 돌렸다.
뒤로, 또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자 카메라에 가득 남편이 담겼다.
“이 동네가 이렇게 생겼구나.”
“천정과 텅 빈 하늘만 보다가 이렇게 나무, 건물,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좋다.”
남편의 눈에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번졌다.
그 눈물이 내 가슴에 떨어져 손 끝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3분도 채 되지 않아 침대에 앉았다.
얼굴엔 핏기가 없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그저 일어선 것 밖에 없는데… “
“당신 보름 만에 일어난 거야. 아직 수술에서 회복도 덜 됐고, 누워있어서 몸의 근육이 많이 빠져서 그럴 거야.”
남편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유전자가 있는지 타고난 뼈대와 근육이 컸다.
운동 한 번 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큰 편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보름 넘게 누워있는 동안 남편의 다리는 깁스를 오랫동안 한 후 푼 다리처럼 뼈와 피부만 남아있었다.
“며칠만 노력하면 점점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컨디션 좀 돌아오면 그때 또 시도해 보자.”
일어서기 한 번 시도한 남편은 그 후 하루종일 지쳐 잠을 잤다.
수술 둘째 날부터 침대에 기대 60도 정도 몸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몸을 60도가량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음식물이 기도에 걸릴 우려가 있어 16일 동안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4시쯤 권교수님이 회진을 오셨다.
“설상호 환자분, 수술부위 통증은 어때요?”
“선생님, 솔직히 너무 아파요. 그래도 신경을 누르는 통증에 비하면 참을만합니다.”
“그런데 정말 참기 힘든 게 있어요.”
“…… “
“배가 너무 고파요. 밥은 언제부터 먹을 수 있을까요?”
무표정한 권교수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방귀는 뀌었나요?”
“네. 3시간 전에 나왔습니다.”
“미음 정도는 시작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시간이… 음… 식사 신청 시간이 지났네요.”
“지하 1층 죽집이 있긴 한데요.”
권교수님이 나가시고, 나는 지하 1층 죽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죽집은 문을 닫지 않았다.
채소죽을 가장 묽게 부탁했다.
남편은 내가 쇼핑백에서 죽을 꺼내고, 뚜껑을 열어 숟가락으로 빠르게 원을 그리며 식히는 일련의 과정에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을 입 안에 넣는 순간 남편은 잠시 정지했다.
“하아, 너무 맛있어.”
“죽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처음 바나나를 맛본 아기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다음날 아침밥으로 나온 죽식사는 흰 죽에 간장, 생선, 채소무침 등이 나왔다.
평소 같으면 입에도 안 될 반찬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맛봤다.
남편은 차려진 모든 음식에 감탄사를 보냈다.
“원래 미나리무침이 이렇게 맛있었어? 와~”
나물은 맛도 없고 금방 썩어버리는데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남편의 입맛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다시 걷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운동 일정을 짰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하루 3번 식후 30분 앉았다 일어났다 재활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일어나기 전 침대 밑으로 내려간 몸을 발바닥으로 밀어낸 후, 팔꿈치와 어깨뼈를 이용해 등을 쓸면서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야 침대가 접히는 부분에 엉덩이가 위치해 침대를 세울 때 허리가 안 아프다.
하루종일 이 자세를 반복한 탓에 수술부위 드레싱이 떨어졌다.
잠시 후 정형외과 레지던트 선생님이 드레싱세트를 들고 나타났는데 상호 씨가 수술받기 전 수술 동의서를 받아갔던 눈썹인 진한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요. 이렇게 수술이 잘 돼서 너무 다행입니다.”
“마취 동의서까지 사인하시느라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여전히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얘기했다.
사실, 의사 선생님이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그저 수술동의서는 수술을 위한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병원 선생님들의 특징이 있었다.
그건 정말 진심 어린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 병원을 다니면서 의사 선생님의 진심 어린 눈빛을 기대한 적도 없고, 그런 것이 애초에 존재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데, 이 병원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응급실을 통해 응급병동으로 올라왔던 새벽 수술을 막 끝낸 정형외과 교수님이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고 가셨고,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 남편의 몸상태에 대해 얘기할 때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었다.
그리고, 단발머리 간호사분의 진심 어린 응원의 눈빛,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레지던트 선생님까지.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모여있을까?’
이 병원은 그런 면에서 비현실적이다.
마치 ‘슬기로운 의사생활’ 실사판 같다.
아침, 점심 두 번 ‘다시 일어나 걷기’ 위해 열심히 일어서기 연습을 했다.
“설상호 환자분, 벌써 이렇게 일어나는 거예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권교수님이 바라봤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혹시 척추에 안 좋을 수 있으니.”
“정형외과 주치의 김교수님은 수술 후 4일부터 일어나도 괜찮다고 하셨는데요.”
권교수님은 심각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일단 정형외과 교수님에게 문의해 볼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히 하세요.”
‘조심히’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혹시 그간의 시도 중 척추뼈에 미세 골절이 생긴 건 아닌지 덜컥 걱정되었다.
일단 정형외과 선생님의 회신이 올 때까지 일어나는 연습은 쉬기로 했다.
문제는 일어서는 연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수술 후 6일째 되던 날 피검사에서 이상 수치가 감지되었다.
혈액응고에 문제가 생겨 혈장 3팩을 수혈받았다.
그다음 날은 혈장 4팩을 수혈받았고, 또 그다음 날은 혈장 2팩과 혈액 2팩을 수혈받았다.
그리고, 거의 멈추는 듯하던 수술 부위에 연결된 석션포트에 모인 피의 양이 점점 증가했다.
피의 양을 측정하는 종이컵은 수술 6일째에 40미리였다가 점점 늘어 100미리를 넘어섰다.
출혈의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오전 회진 후 권교수님은 나를 간호스테이션 안 책상자리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