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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Aug 30. 2023

난 아마추어다.

야구인의 미친 주말

주중부터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죄다 야구팀이다.


"토요일 15시 연습 늦지 않게 오세요~"


"형님, 제발 나와주셔야 됩니다.

 이번 경기 잡으면 플레이오프 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가 1위 팀인데 잡으려면 형님이 꼭 필요합니다."


"아... 민이 없으면 안 되는데..."


"전승 가셔야죠! 상대는 2위 팀입니다."


토요일엔 오전 연습+연습경기,

일요일엔 세 경기가 잡혔다.

일요일 두 경기는 시간이 겹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프로도 이렇게는 안 한다.

하지만 이건 아마추어라서 가능한 일이다.


Amateur는 Amor(사랑)에서 파생된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냥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사랑하고 즐기는, 

나는 아마추어다.

김성근 감독이 "돈 받으면 프로야"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야구 레슨을 받고 리그 6개를 뛰며

돈만 쓰고 있는 나는 프로와는 가장 거리가 먼

찐 아마추어다.


두 팀 다 내가 거의 유일한 주전 투수라

나 없이는 경기가 힘들어지는 상황.

내 몸값이 언제 이렇게 올랐나...

몸값은 올랐는데 수중에 돈이 안 들어오는 게 함정.

아무튼 야구인생 정점을 찍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결국 난 한쪽 팀에 양해를 구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이 걸린 팀을 선택했다.



토요일 아침. 

가족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집을 나섰다.

1시간 펑고로 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가 풀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2시간의 연습 경기.

내 땀 냄새에 내가 기절할 것 같았다.


기능성 옷의 기능이 다한 건지

막걸리 때문에 땀냄새가 지독해진 건지

나이가 들어서 몸에 냄새가 나기 시작한 건지...

이날 경기가 잘 안 풀린 모든 탓을

이 냄새나는 언더티에게 모두 뒤집어 씌웠다.

결국 경기가 끝나자마자 언더티를 벗어 

바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10년 가까이 입었으니 천수를 누렸구나.

내일 중요한 경기에 부정 탈 요소를 제거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야구하고 집에 와서 다시 아빠의 역할로~

며칠 전 테러를 당한 아이들 자전거를 끌고

아이와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요즘 너도나도 거리로 나오는 미친놈 중 하나인지

술 취한 놈인지 모르겠지만 

자전거 보관대에 세워둔 아이들 자전거를 박살 냈다.

딱 우리 애들 자전거 두 대만...


"혹시 원한 관계가 의심되는 사람이 있니?"


아이에게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

CCTV가 없는 곳이라 범인을 잡을 수도 없고...

가짜 CCTV라도 달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이 와중에 아이 자전거에 전단지 한 장이 붙어 있다.


"자전거 출장 수리"


뭐야! 혹시 이 자식 아니야?



어느덧 또 야외 연습 나갈 시간.

이번 구청장기 토너먼트 대회를 앞둔 

레슨장 팀의 야외 훈련이다.

땡볕에서 지옥의 펑고 3시간...

땀과 흙먼지로 뒤덮여 녹초가 됐지만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해 낸 내가 대견했다.

나 아직 살아있네~


야구하고 와서 절대 피곤한 티를 내면

안된다는 건 야구인의 철칙!

내일 새벽 경기가 있지만

아내와의 술 한잔이 내겐 더 중요하다. 

아내 심기 관리는 야구인의 제1순위!

(아내는 왜 항상 술 먹을 때

자기 핑계를 대냐며 뭐라고 하지만...)

내일 눈이 떠지긴 하겠지?



일요일 새벽.

소염진통제를 먹고 파스에 테이핑까지...

팔꿈치 통증 때문에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엔

진통제를 먹어야 전력투구를 할 수 있다.

아침 6시도 되기 전 야구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상대는 1위 팀. 역시 강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 강했다.

나는 타격에서는 3타점을 올리고

6이닝 완투승(삼진 7개)으로

우리 팀 플레이오프 진출을 거의 확정 지었다.


"여긴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고 집에 왔는데

아직도 가족들은 꿈나라다.

얼른 씻고 아침 겸 점심을 준비했다.

빨래를 돌리고 아이 수학을 봐주고

아내와 영화도 한편 봤다.

바로 또 저녁식사 준비를 마치고

진통제를 하나 더 먹고

경기장으로 출발~


미쳐도 곱게 미치라는 선조들의 말씀처럼

야구에 미쳐도 염치와 눈치는 있어야 한다.


2위 팀이 우리를 잡겠다고 이를 갈았다.

야구 잘하는 사람들을 대거 영입했다.

5:3으로 뒤지고 있는 3회에

내가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어찌저찌 마지막 이닝 9대 8 상황.

이번 이닝을 막으면 우리의 승리다.

안타 두 대를 맞았다.

무사 주자 1, 2루. 최대 위기다.

고의사구로 만루를 채웠다.


무조건 땅볼을 유도해야 했다.

슬라이더가 제대로 먹혔다.

투수 앞 땅볼로 홈에서 아웃!

삼진, 유격수 플라이로 이닝 종료!


난 마운드에서 두 손을 번쩍 들었고

팀원들이 모두 내게 달려와

마운드에서 얼싸안고 강강술래를 했다.

12년 차 야구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오타니가 팔꿈치 부상으로 아웃된 상황에

이제 남은 건 설타니 뿐인가?



이런 날 승리의 막걸리가 빠질 수 없지~

기분 좋게 한잔하고

다음날 일어나니 위가 콕콕 쑤신다.

소염진통제를 먹을 땐 술을 먹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 검색을 해보니

술을 마시면 위에 빵꾸가 날 수도 있단다.

이런...

술을 포기할지 진통제를 포기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월요일, 온몸이 쑤시고 천근만근이지만

환상적인 두 경기의 기억 때문에

고통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해 분리수거를 하고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아이들은 태권도에 갔고...

모임 중인 아내에게 카톡을 보낸다.


여보, 야구레슨 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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