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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작가 Nov 21. 2023

야구에 미친 자

나에게 올 한 해를 정의하라면

'야구에 미친 해'다.

('해'라는 우리말이 있어 다행이다.)


요즘 플레이오프 진출 팀을 가리는 중인데

내 팀들은 2개 리그에서 진출이 확정됐고

1개 리그는 이번주 경기 결과에 명운이 달렸다.

다 내가 멱살 잡고 끌어올리는 중이다.


5개 팀, 6개 리그를 뛰고 레슨까지 받는 나는

야구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런 놈이 육아서를 썼다는 사실에

육아서 자체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도대체 비결이 뭔지 궁금하다는 사람도 있다.

(일단 책부터 사보고 얘기 나누시죠~)


아이들이 크니 크게 손 갈 일이 없고

아내도 빡빡한 일정에 바쁘신 몸.

각자 자기 행복 찾아 알아서 잘 사는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역시 인생의 꽃은 40대 인가...


열심히 한 만큼 훈장도 쌓이고 있다.

불규칙 바운드에 맞아 터진 입술,

(제때 치료를 안 받아 상처가 남았다)

빠따질로 까지고 굳은살 박힌 거친 손,

(아들 볼을 만질 때마다 꺼끄럽다고 난리다)

슬라이딩으로 딱지와 멍 투성이인 무릎,

(나이 드니 새 살도 안 나, 멍도 안 없어져)

테이핑을 자꾸 붙였다 떼니 다 일어난 피부,

(싼 게 비지떡인가? 돈과 피부를 바꿨다)

주차 중 파울볼에 맞아 움푹 파인 자동차,

(야구인의 훈장이라 여기고 냅두고 있다)

근육통과 어깨 팔꿈치 통증은 기본값...

(소염진통제와 근이완제는 경기 전 필수)


난 20대 때까지 뭐 하나에 미쳐본 적이 없었다.

내 또래 대부분이 한 번쯤 빠져봤던 만화책도,

스타크래프트, 당구, 핸드폰 게임까지도...

그냥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였던 건지,

빠질 게 두려워 시작을 안 했던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술 취해 노래방에서 미친 듯 춤추고

노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난 취해도 정신줄을 못 놓겠다.)


나도 미쳐보고 싶었다.

말이 좋아 중용이지 이쪽도 저쪽도

한 번도 미쳐본 적 없이

어정쩡하게 사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야구에 미친놈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듣고 싶었던 소리인지...


그렇다고 야구에 미친놈으로 사는 게 쉽진 않다.

항상 아내 심기를 살펴야 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피곤한 티를 낼 수 없다.


얼마 전 오전 경기를 마치고 와 집안일을 했다.

설거지, 빨래, 청소...

이걸로는 부족해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물을 너무 많이 뿌렸나?

두꺼비집이 내려갔다. 이런...

돌고 있던 세탁기도 멈추고

전기와 인터넷까지 다 끊겼다.

멀쩡히 일하고 공부하던 아내와 아들이

폭탄을 맞았다. 날은 왜 이리 어두운 거야?

콘센트에 묻은 물을 닦고 별 짓을 다 했지만

두꺼비집은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우리집 두꺼비는 죽은 것 같았다.


한 시간째 집은 어둠상태였다.

오후 경기시간이 다가왔다.

이 상태로 혼자 야구하러 는 상상을 해봤다.

진짜 웃기겠다 싶어 혼자 실실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 인생에 야구는 없다고 생각하니

웃음기가 확 가셨다.

아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며

아내가 한마디 했다.


"잘해보려다가 이렇게 돼서 속상하겠네~"


와...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성은이 망극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마침 야구팀에 전기 일을 하는 동생이 떠올랐다.

바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형님, 제가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였다.

(메인 전원은 내린 채로 화장실이 아닌

 다른 전원을 올리고 멀티탭으로 연결해

 드라이어로 양쪽 화장실 콘센트를 말리니 해결!)


다행이다... 야구하러 갈 수 있겠구나...

일을 마무리하고 집을 나서며 말했다.


"야구팀에 전기 전문가가 있어서 망정이지,

 내가 야구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모든 야구인들의 무사 생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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